‘호주 와인 그랜드 테이스팅’ 행사에서 와인을 시음하는 사람들. 호주무역투자대표부 제공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와인=시라즈’는 공식처럼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자라는 포도나무 세 그루 중 한 그루가 시라즈 품종이다(휴 존슨·잰시스 로빈슨, <월드 아틀라스 와인>). 프랑스 론 북부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는 품종인 시라(Syrah)가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특별히 시라즈(Shiraz)로 불리게 된 이유는, 같은 품종으로 각각의 땅에서 생산된 와인이 확연히 다른 맛을 내기 때문이다. 땅마다 개성은 조금씩 다르지만 프랑스 론 북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시라가 주로 붉은 베리, 후추 등 드라이하고 강인한 맛이라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라즈는 말린 베리, 초콜릿, 흙 향 등이 뒤섞인 부드럽고 농밀한 맛이 특징이다.
그런데 세계 와인 생산 5위를 차지하는 거대한 섬나라에서 시라즈라는 공식만 존재할까. 19세기 말 시작한 오스트레일리아 와인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 시라즈가 ‘대세’이긴 해도, 이 나라엔 뜻밖에 시라즈 외에도 매우 많은 품종의 와인이 생산된다. 65개 지역에서 100종 이상의 포도 품종이 자라고, 2천개가 넘는 와이너리가 부지런히 술을 만들고 있다.
10월26일 서울 중구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에서 열린 ‘호주 와인 그랜드 테이스팅’ 또한 다양한 종류의 와인을 만나볼 수 있는 행사였다. 국내 수입되는 오스트레일리아 와인은 약 170종, 이 가운데 150종이 이날 전시됐다. 오스트레일리아 와인을 상징하는 시라즈를 비롯해 리슬링, 피노 누아르, 메를로, 세미용 등을 맛보고 산지별 특성을 분석하는 마스터 클래스도 열렸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호주무역투자대표부(Austrade)의 대니얼 보이어 부사장을 만나 최근 오스트레일리아 와인 경향과 한국 와인 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하는 이유를 물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와인은 1800년대 중후반 유럽에서 온 개척자들이 포도나무를 심으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오스트레일리아 건국(1901년) 이전부터 생산된 셈. 일종의 ‘전통주’인만큼 소비층도 한국보다 두껍다. 호주무역투자대표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시라즈 다음으로 샤르도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 많이 생산됐다. 템프라니요, 그뤼너 벨트리너 등 스페인이나 오스트리아가 주요 산지인 포도로도 개성 있는 와인을 만든다. 보이어 부사장은 “이민자들의 나라인 만큼 고향의 다양한 품종을 가져와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실험 정신이 오스트레일리아 와인 시장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최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블렌딩 하는 와이너리, 유럽 품종이지만 유럽과 또 다른 맛이 나는 와인들이 유행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젊은 와인 메이커들이 부유한 유럽에 펀치를 날리는 남반구의 반격 와인”(<월드 아틀라스 와인>)들이 야심 차게 생산되고 있다는 것.
10월26일 서울 중구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에서 인터뷰 중인 대니얼 보이어 호주무역투자대표부 부사장. 호주무역투자대표부 제공
이를테면 리슬링 같은 품종이다. 리슬링은 독일 와인을 대표하는 품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꽤 오랜 세월 생산되었고, 이제 ‘오스트레일리아 리슬링’도 제법 자리를 잡았다. 와인 가이드북 <와인폴리>에는 리슬링이 독일, 미국 다음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많이 나온다고 썼다. 리슬링은 오스트레일리아 남부의 서늘한 지역인 에덴밸리, 클레어밸리, 애들레이드힐스 등에서 주로 생산된다. 독일의 리슬링이 산도와 미네랄, 과일 향의 탄탄한 균형을 앞세운다면 오스트레일리아 리슬링은 진한 꽃향기, 과일 향, 상큼한 라임주스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섬세하고 까다로운 품종으로 유명한 피노 누아르는 프랑스 부르고뉴산을 최고로 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점점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땅이 넓은 만큼 생산 지역의 기후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의 피노 누아르를 생산한다. 남극에 가까운 태즈메이니아는 서늘한 기후 덕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특히 품질이 좋은 피노 누아르가 생산되기로 유명하다. 태즈메이니아의 피노 누아르는 체리, 딸기 등 가볍고 섬세한 풍미를 앞세우며 매끄럽게 이어지는 긴 여운이 인상적이다. 태즈메이니아보다 따뜻한 모닝턴페닌슐라, 야라밸리 등에서는 좀 더 화려한 풍미의 과일 향이 나는 피노 누아르가 생산된다.
보이어 부사장은 수많은 시도와 실험을 통해 다양한 와인이 생산되는 만큼 오스트레일리아의 와인 시장도 해마다 성숙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원샷’ 문화가 있었는데, 이제는 술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시는 문화로 넘어온 지 오래”라는 것. “술을 사서 바로 마시는 것보다, 와인을 사서 보관해두고 충분히 숙성해 그 맛을 즐기는 소비자도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음주 문화가 한국에서도 빠르게 퍼져간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혼술’, ‘홈술’ 문화가 퍼지면서 와인과 전통주 등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술 소비량이 급증했다. 영국 와인 전문매체인 <와인 인텔리전스>에서는 한국을 2020년부터 두 해 연속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와인 시장’ 2위로 꼽았는데, 보이어 부사장 또한 “한국은 10개의 가장 중요한 시장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오스트레일리아 본가에 와인 2천병을 보관하고 있을 정도로 애주가이기도 한 보이어 부사장에게 한국 음식과 오스트레일리아 와인의 페어링을 물었다. 그는 “한국의 가을이 좋은 이유는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모두 마시기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녹진하고 풍성한 풍미의 시라즈나 카베르네 소비뇽은 짭조름하면서 달콤한 숯불갈비와 매우 잘 어울리고, 비빔국수나 매콤한 찌개를 먹을 때는 당도가 있으면서 상큼한 리슬링을 곁들이면 좋겠다”고 권했다. “신선한 해산물과 잘 어울리는 샤르도네”도 추천했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 남서부 마거릿리버 지역의 샤르도네는 잘 익은 복숭아·자몽 향에 크리미한 질감이 나 굴이나 갑각류 등 해산물의 맛을 끌어올린다.
세상은 넓고, 먹고 마실 것은 많은 만큼, 이제는 ‘오스트레일리아=시라즈’라는 공식을 벗어나 개성 있는 품종들을 찾아 탐험을 떠나봐도 될 듯하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