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걷다 보면 일본 교토·나라
빗장 푼 일본 소도시에서 4박5일
문화인류학자 쓰지 신이치 만나고
교토 300년 식당·예술 정원 가고
귀촌 택한 이들의 행복 함께 느껴
빗장 푼 일본 소도시에서 4박5일
문화인류학자 쓰지 신이치 만나고
교토 300년 식당·예술 정원 가고
귀촌 택한 이들의 행복 함께 느껴
일본 교토에 있는 은각사의 가을 풍경. 김남희 제공
정원 예술가인 시게모리 미레이가 설계한 정원. 김남희 제공
사람과 사람 사이 지난주에 다녀온 4박 5일의 일본 여행은 사람과 사람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를 들여다보며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는 시간이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교토와 나라에서 우리는 일본 친구들의 친절에 기대어 닷새를 보냈다. 여행은 그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여행의 시작은 타인의 다정함 덕분이었다. 올해 여름 ‘방과후 산책단’을 꾸려 조지아에서 트레킹을 하던 중, 다섯 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 하나씩 감염자가 늘어갈 때도 그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챙겼다. 우리 정부의 입국 제한 조치로 인해 세 명이 열흘간 조지아에 남아야 했을 때도 그들은 여유와 품격을 잃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준 태도가 나를 흔들었다. 이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그때 약속했다. 일본이 열리면 다 함께 일본에 가자고, 좋은 친구들을 소개해주겠다고. 다섯 달 만에 우리는 다시 모였고, 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나의 벗이자 스승인 쓰지 신이치 선생님(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슬로 라이프〉 〈행복의 경제학〉 등 저서로 지구와 사람을 살리는 삶의 방식을 설파해왔다). 선생님과의 인연 덕분에 친구가 된 마유미와 카오리를 만나러 떠나는 여행. 딱히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보기보다는 교토라는 옛 도시 안에서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기보다는 다정한 사람들과 매 순간을 충분히 누리고 싶었다. 첫날 저녁을 먹은 교토 시내의 식당은 마유미가 엄선한 곳이었다. 사케를 만드는 양조장으로 시작해 300년 역사를 지닌 식당이었다. 기모노를 입은 분이 음식이 나올 때마다 재료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찬찬히 설명했다. 저녁을 다 먹기까지는 두 시간 반이 걸렸다. 긴카쿠지(은각사)에서 내려와 철학의 길을 걷다가 만난 그 동네 남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꽃잎과 대나무 잎으로 조각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어여쁜 배를 한 척씩 받은 우리는 저마다의 작은 소망을 담아 냇물 위로 띄워 보냈다. 나는 조지아에 함께 갔지만 이번 여행에는 오지 못한 제이(J)샘의 쾌유를 빌었다. 교토의 정원 예술가인 시게모리 미레이가 설계한 정원을 보기 위해 고묘인(광명원)에 들렀을 때도 우리는 잠시 흐르는 시간을 잊었다. 정원의 툇마루에 앉아 열일곱 개의 바위로 내려앉는 햇살을 말없이 지켜보고,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나무를 어루만지는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이 세계의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로부터 멀어져 잠시나마 자연의 시간을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가와이 간지로 기념관 앞에서 ‘방과후 산책단’과 기념 촬영을 하는 쓰지 신이치(윗줄 오른쪽 첫번째) 선생님. 김남희 제공
한국과 일본의 찻사발을 섞은 후 어느 나라의 것인지 맞히게 하는 마유미(왼쪽). 김남희 제공
서로의 마음을 두드렸던 시간 마유미는 우리 일행 열 명을 망설임도 없이 집으로 초대했다. 기모노를 단정히 차려입은 마유미와 딸 사야카가 우리를 위해 일본식 다도를 준비했다. 화로가 놓인 차실에 앉아 마유미와 사야카가 우려주는 말차를 마셨다. 다도는 친구들과 함께해야만 의미가 있는 거라고, 다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차를 마시는 손님이라고 마유미는 강조했다. 복잡한 형식으로 보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즐겁고 맛있게 차를 마시는 것뿐이라면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 지식이 깊은 마유미는 우정을 위해 찻잔도 한국과 일본의 것을 섞어 골랐다. 다식 하나까지 정성을 다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신이치 선생님, 마유미와 함께 찾아간 가와이 간지로의 기념관도 한국과 일본이 조화를 이룬 곳이었다. 일본의 근대 도예가인 그는 한국과 중국 도자기에 영향을 크게 받았고 한국의 공예품을 사랑했다. 그의 집에는 조선의 소반들이 놓여 있었다. 옥빛의 화병을 가리키며 신이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이 색을 봐. 한국의 영향을 깊이 받은 색이지?” 아라시야마의 두부 요리 전문점에서 저녁을 먹고 나온 밤은 마침 개기월식이었다. 붉은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덮여있었다. 우리는 그림자에 갇혀 이지러진 달을 바라보며 ‘달로 향하는 다리’ 도게쓰교를 건넜다. 함께 걷는 사람들도, 강물에 비치는 붉은 달빛도 따스하기만 해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밤이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친구는 나라 외곽의 시골 마을에 사는 카오리였다. 나라 역에서 한 시간에 한 번 다니는 한 량짜리 기차를 타고 30분쯤 가면 그가 사는 마을이다. 가을빛이 넉넉히 드리운 강변을 따라 그의 집까지 천천히 걸었다. 카오리가 이 마을로 내려온 건 10년 전. 오사카에서 살던 그는 자연 가까이에서 자신의 먹거리를 스스로 해결하며 살고 싶다는 소망으로 귀촌했다. 그의 친구가 이곳에서 가죽 작업을 하며 살고 있던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시골집을 빌려 월세를 내며 5년을 살았다. 그 후 텃밭과 마당이 딸린 60년 된 집을 250만엔(약 2400만원)에 구매했다. 그 집을 일 년에 걸쳐 직접 고쳤다. 이 정도 규모의 집이라면 보통 리모델링 비용이 3억쯤 나오는데 그는 1억 정도의 비용으로 해결했다. 타일까지 직접 붙였기 때문이다. 벽에 석회를 입힐 때는 300㎏의 석회를 사서 친구들과 같이 발랐다. 이 집에는 친구들 스무 명의 도움이 깃들어있다고 말하며 그는 웃었다. 남자친구인 우메짱도 150년 된 농가를 사서 손수 고쳐 목공 작업실로 쓰고 있다. 일주일에 나흘은 와카야마에서 목공과 옻칠 작업을 하며 보내고 사흘은 이곳으로 와서 카오리와 함께 지낸다. 이 집의 많은 가구와 소품이 그들이 직접 만든 것들이었다. 시골로 이사 와서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물으니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을 누리며 사는 것, 자연 속에서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느끼며 사는 것, 내가 먹는 음식의 많은 부분을 스스로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시골로 내려온 일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고 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텃밭 농사를 지으며 바느질 작업으로 만든 지갑과 가방을 일본 전역에서 전시하며 팔고, 겨울에는 좀 더 느긋한 시간을 가지며 살아간다. 그야말로 덜 갖되 더 충실한 삶을 누리고 있다. 우리의 방문을 위해 그는 친구 이마짱과 함께 자연농법으로 키운 채소와 작물로 점심을 준비했다. 카오리가 수확한 땅콩과 검은콩을 올린 밥도, 우메짱이 재배하고 발효시킨 우롱차를 넣고 끓인 죽도, 이마짱 텃밭의 무화과와 귤을 넣은 샐러드도, 가지나물도, 새우와 쑥갓을 넣은 튀김도, 무와 단감 초절임도 한결같이 맛이 좋았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 계절의 시간이 오롯이 배어있는 음식들이었다. 우리는 카오리의 또 다른 친구 치애짱을 따라 그가 만든 버섯 춤을 함께 추며 깔깔거리기도 했다. 지금 여기에 더불어 존재하는 일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온전히 나누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경을 가로질러 서로의 마음을 두드렸던 시간이었다.
카오리가 1년에 걸쳐 친구들과 함께 고친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김남희 제공
꽃잎과 대나무 잎으로 만든 조각배. 김남희 제공
한국의 소반이 놓인 가와이 간지로 기념관. 김남희 제공
지금 이 순간, 당신 덕분이다 지난해 신이치 선생님은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와 함께 〈사이의 사상―단절에서 관계로〉라는 책을 펴냈다. 우리는 마유미의 집 거실에 모여앉아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 시간, 공간 이 단어들은 이미 첫 글자만으로 의미가 이미 통하는데 ‘사이 간’자는 왜 들어갔을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영어에서 ‘사이’를 뜻하는 ‘비트윈’(between)은 물리적 거리를 말한다. 반면 중국어를 비롯해 한국어와 일본어에도 존재하는 ‘사이’라는 단어 ‘간’은 관계를 뜻한다. 불교를 비롯한 동양 사상에서 개인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사람으로서의 정의를 갖게 된다. 서양이 자신을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면 동양에서는 상대를 염두에 두고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 관계가 비롯된다. 관계를 벗어나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순수한 자립이나 독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반드시 다른 관계로 걸어나가고 있는 것일 뿐. 자립이냐 의존이냐의 이원론이 아니라 자립과 의존이 얽힌 관계의 그물 안에서 살아가는 게 인간이다. 우리는 그동안 자연이나 고향, 공동체와의 관계 등 다양한 ‘사이’를 끊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진보나 발전이라고 믿었다.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은 전근대적이라 여기며 분리의 시대를 살아오던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해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가 통과해온 지난 2년이 떠올랐다. 자영업자나 프리랜서에게 더 가혹했을 팬데믹의 시기를 나 역시 힘겹게 거쳐왔다. 그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건 다정한 이들의 호의와 격려 덕분이었다. 안부를 묻고 먹거리를 나누고 때로는 용돈을 건네준 벗들이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었다. 나는 그 사람들 덕분에 살아남았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우리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오카게사마데”(덕분에) 였다. 우리는 마치 그 말이 신성한 주문이라도 되는 듯 즐겨 썼다. 이 음식이, 이 한 잔의 차가, 지금 이 순간이 모두 당신 덕분이라는 그 말은 우리의 진심이었다. 타인이 없이는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당신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다. 이번 여행을 함께 한 시인 케이(K) 선생님은 그의 소셜미디어에 우리의 여행을 이렇게 정리했다.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나는 그 섬에 다녀왔다.’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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