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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구매할 때 의미부여를 잘하는 편이다. 꼭 필요해서 사는 것보다 가져야 할 이유를 찾아낸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물건을 사들인다는 게 아니라 유용함에 가치와 의미를 더하는 것이다. 특히 공예품을 들일 때는 더욱 그렇다. 바느질하는 최희주 작가의 푸른 모시 바느질함은 친구들에게 모시 책갈피를 직접 만들어 선물하겠다는 의지로 인연을 맺었다. 한결 작가(옻칠공예가)가 나무를 돌멩이처럼 깎아 옻칠한 일명 ‘목멩이’는 아기의 공갈 젖꼭지처럼 심리적 안정을 위한 용도로 틈틈이 손에 쥐고 어루만진다. 신문이나 책을 읽을 때 쥐고 있으면 유독 집중이 잘 되는 신박한 경험도 하고 있다. 만드는 이의 뜻과 정성을 존중하고 나만의 해석이 어우러진 공예품과 함께 하는 삶은 색동옷처럼 알록달록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시인의 철학이 담긴 절절하고 농익은 시구가 와 닿아 마음에 윤기를 더하듯 공예가의 깊은 사유와 끈질긴 집념이 퍽퍽한 일상이 아닌 윤택한 삶으로 가꾼다.
2023년 새해를 맞이하는 해오름달, 1월은 첫날 신정부터 구정 설날까지 한 달 내내 서로의 복과 건강을 빌고 덕담을 나눈다. 예로부터 전해진 풍습인 세배와 설빔, 떡국은 물론이고 매양 뜨는 태양이건만 1월 1일 첫 일출을 특별하게 여기는 모습까지 그 어느 달보다 의미부여가 풍성한 달이다. 하얗고 길쭉한 가래떡이 재료인 떡국은 무병장수와 부귀의 염원을 담고, 세배 후 어른이 주시는 돈은 ‘복돈’이라 여긴다. 설빔은 한 해 동안의 길운(吉運)을 바라고 새로운 각오와 마음을 다지는 의미로 마련하는 옷으로 아이들과 집안 어른의 설빔에 유독 정성을 들였다. 삼라만상에서 고운 색들만 모은 색동 소매 옷은 아이의 앞날이 밝고 곱게 트여 출세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었다. 어른에게 새 옷을 해드릴 형편이 아니라면 버선이라도 마련해 신겨 드리며 살이 빠지진 않으셨는지 가늠하며 효를 실천했다. 1980년대, 내 어린 시절까지도 설빔 풍습이 이어져 설날은 새 옷을 입을 수 있는 행복한 명절로 기억한다. 이번 설에는 그 설렘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고, 설빔이 아니라면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는 좋아하는 공예품이 가득한 나의 아지트가 있다. 2021년에 문을 연 서울공예박물관이다. 근처에 볼일이 있으면 빼놓지 않고 들러 다채로운 공예품을 눈과 마음으로 소유한다. 약속 사이에 비는 시간이 있을 땐 1층에 있는 공예도서관을 이용한다. 따스한 햇볕이 머무는 편안한 서재 같은 공간 연출과 공예와 역사, 전통문화에 충실한 소장도서가 매우 흡족하다.
송년 모임이 이어지던 지난 12월 말, 잠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른 서울공예박물관에서 <백자,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라는 기획전시를 관람하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2023년 설날에는 어린 시절 설빔처럼 설 그릇을 백자로 마련해 떡국을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이미 백자 대접에 떡국을 담는 분들이 많겠지만 나에겐 뽀얀 백자 대접이 없으니 말이다.
목적이 생긴 만큼 전시를 보다 꼼꼼하게 살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공예인 백자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갖고자 하는 욕망만큼 익혀야 함을 다짐하며. 백자의 고요하고 고담한 색은 값비싼 안료를 낭비하지 않고 최고의 작품을 얻기 위한 장인들의 부단한 유약 실험을 통해 발전되었음을 이번 전시를 통해 소상히 알 수 있다. 화려한 고려청자와 달리 담백하고 부드러운 선을 이루는 조형과 견고함까지 갖춘 백자는 검약을 미덕으로 삼았던 유교 사회인 조선이 빚어낸 미니멀리즘의 정수다. 조선의 그릇이 여전히 우리 식탁에서 고운 자태로 활약하는 것을 보면 조선백자의 미니멀한 미감이 얼마나 현대적인가 감탄하게 된다.
더불어 국립중앙박물관 3층에 있는 분청자기·백자실의 빼어난 전시도 추천한다. 2021년에 새 단장을 한 이곳은 단순한 시대순 유물 전시를 벗고, 도자기를 통해 조선 시대의 흐름을 관통할 수 있게 한 구성과 디지털 콘텐츠의 접목, 모던한 인테리어 덕분에 백자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질 수 있다. 특히 이름없는 조선 장인들이 만든 200여 개의 사발을 한데 모아 국보나 보물과는 다른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그야말로 박물관은 나의 의미부여 영감이 샘솟는 원천이다.
조선백자를 알았으니 현대 도예가들의 백자를 만나야 할 순서다. 떡국을 담을 그릇이니 나의 요리 선생님들에게 먼저 조언을 구했다. 얼마 전 채소로 깊은 국물을 낸 떡국을 전수해준 채소 요리 전문 스튜디오 뿌리온더플레이트의 이윤서 선생님은 백자의 매력부터 소개했다. “채소가 가지고 있는 초록, 빨강, 노랑, 보라 등 본연의 색을 순백의 백자 그릇이 편안하게 품어줍니다. 백자가 가진 특유의 너그러움과 여백의 미는 채소 요리의 편안한 에너지와 잘 어울리죠. 특히 요즘 국물 요리를 담을 때 자주 애용하는 백자는 ‘해인요’의 각면기입니다. 조선 시대 도공들의 얼과 미가 다시 구현되는 것 같아 기쁘고 설렙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요리 교실 ‘구루메 레브쿠헨’(Gourmet Lebkuchen)을 운영하는 나카가와 히데코 선생님은 백자의 기품은 고아한 곡선에서 비롯되는데, 이기조 작가의 백자는 담백하고 미려한 곡선이 특히 아름답다고 전한다. 프라이빗 푸드 클래스 ‘어연’의 이민주 선생님은 단정한 순백을 표현하는 라기환 작가의 백자 면기를 추천했다.
평소 갤러리 전시나 공예 전문 숍을 통해 만나 마음에 품은 백자도 물론 있다. 눈꽃 같은 결정이 보석처럼 박힌 이정미 작가의 팔각 굽볼과 이정용 작가의 은채백자와는 언젠가는 꼭 인연을 맺어 귀한 대접을 위한 그릇으로 쓰고 싶다. 매년 설마다 설빔 대신 설 백자를 마련한다면 이 욕망도 꿈으로만 그치지 않고 새해 각오와 마음을 담는 우리 집만의 새해 풍습이 되지 않을까.
글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