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4090m에 있는 볼리비아 포토시 너머로 보이는 세로 리코 광산.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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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프리츠 랑 감독이 만든 〈메트로폴리스〉는 영화 역사상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지하’와 향락을 즐기는 ‘지상’, 두 세계가 공존하는 거대도시가 배경이다. ‘하나의 도시, 두 개의 세계’란 설정은 지난 백 년 동안 〈토탈리콜〉, 〈엘리시움〉 등 많은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두 개의 세계로 나뉜 한 도시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얘기지! 그러나 실제 그런 도시가 지구 반대편에 존재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포토시의 11월 10일 광장. 노동효 제공
중세 유럽풍 건물이 많은 포토시 거리 풍경. 노동효 제공
1545년이었다. 구원자, 성모, 우정 등 아름다운 이름을 단 유럽의 범선이 역병, 무기, 탐욕을 싣고 아메리카에 닻을 내리던 시절이었다. 안데스산맥에서 라마를 쫓던 한 목동이 추위를 피하려고 모닥불을 지폈다. 바람을 막으려고 불가에 놓은 돌 표면에서 반짝이는 액체(?)가 흘러내렸다. 열기에 녹은 은이었다. 목동은 몰랐다, 자신이 ‘사람을 잡아먹는 산’의 입을 열었다는 것을, 자신이 선 땅이 ‘두 개의 세계로 나뉜 하나의 도시’를 만들며 세상을 바꿔놓으리란 것을.
그날 목동이 오른 산을 ‘세로 리코’라고 부른다. ‘부유한 산’이란 뜻이다. 산 아래 볼리비아의 광산 도시 포토시가 있다. 지명에 관해선 여러 설이 난무한다. 널리 알려진 바는 ‘큰 소리’에 얽힌 전설이다. 잉카 왕이 산 위로 광부들을 올려보냈다. 그들은 광맥을 파다가 ‘신의 경고’를 들었다. “훗날 먼 곳에서 올 손님을 위해 저장해 둔 것이니 건들지 말라!” 왕에게 보고했고 더 이상 그 산에 손대지 않았다. ‘스페인어로 적힌’ 연대기는 위 이야기와 함께 잉카어로 ‘큰 소리’를 뜻하는 ‘포토시’가 도시명이 되었다고 전한다.
잉카인은 한글이나 알파벳 같은 표음문자를 갖고 있진 않았다. 포토시가 ‘큰 소리’를 뜻한다는 잉카의 기록은 없다. 게다가 스페인 정복자들이 광부용 숙소를 짓기 전까지 포토시 자리는 아무도 없는 황무지였다. 다른 이의 일기에서 포토시 어원을 짐작하는 게 합당해 보인다. ‘선주민은 산, 언덕 등 높은 장소를 가리켜 포토시라고 불렀다.’ 기존 선주민은 포토시보다 300m 낮은 칸투마르카에 거주했다. ‘높은 곳’에 들어선 광산촌을 가리켜 포토시라 불렀으리라. ‘신의 경고’는 은을 독차지할 속셈으로 스페인 정복자가 꾸며냈을 가능성이 짙다. 얼마나 많은 은이 나왔기에 그런 거짓말까지 지어낸 걸까?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출발해 포토시로 향해 가는 길은 완만했다. 완만하다곤 하지만 해발 4000m, 수목한계선 위 고원지대라 주민이 심고 가꾸는 나무를 제외하면 키 큰 나무를 찾기 어려웠다. 황량한 풍경이 이어졌다. 남아메리카의 1~2월은 한여름이지만 안데스 고원은 툰드라 기후에 가깝다. 한여름이라도 낮 기온 영상 15도, 밤이면 3도로 떨어진다. 해발 4090m 포토시 외곽 터미널에 닿았다. 인구 10만명 이상 대도시 중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도시다.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도심으로 향했다. 차창 넘어 광부를 그린 벽화들이 보였다. 숙소에 배낭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유네스코가 포토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건 1987년, 역사 지구의 중심은 대성당 앞의 ‘11월 10일 광장’이다.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비롯해 남아메리카 관련 서적에 자주 등장하지만 관광업이 발달하진 않았다. 성당과 박물관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정보도 없다. 나는 중세 유럽풍 골목을 쏘다니며 ‘두 세계’ 중 첫 번째 세계를 상상했다.
산 아래 황무지가 1만5000명이 사는 광산 도시로 변하는 데는 2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광부용 숙소가, 이어서 제련소가, 술집이, 성당이 섰다. 한 세대가 흐르는 사이 인구는 3배 불었고, 곧 유럽의 수도보다 많은 사람이 사는 대도시가 되었다. 영국 런던 인구가 10만명이 되지 않던 시절 포토시 인구는 16만명에 달했다. 쏟아져 나온 은으로 인해 부가 흘러넘쳤다. 한 달이면 닳는 말발굽까지 은으로 만들 정도였다. 시쳇말로 ‘개도 은화를 물고 다니는 도시’가 된 것이다.
스페인은 포토시에 조폐국을 세우고 쉴 새 없이 은화를 찍었다. 30여개의 성당뿐 아니라 극장, 유흥장, 오락장, 도박장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페르시아산 카펫, 중국산 도자기, 베네치아산 유리 세공품, 아라비아산 향료 등 값비싼 사치품을 포토시로 실어 날랐다. 은화로 값을 치르면 그만이었다. 포토시에서 생산된 은이 전체 유럽에서 유통되던 은의 총량보다 많았다. 성체축일 기간엔 6일간의 희극, 6일간의 가면극, 8일간의 투우, 3일간의 무도회 등 행사가 벌어졌고 〈돈키호테〉에도 ‘발레 운 포토시!’로 등장했다. ‘포토시만큼 가치 있다’는 말은 ‘최상의 부’를 뜻하는 관용구가 되었다.
스페인 왕실은 수중에 들어온 은을 사치와 전쟁으로 진 빚을 탕감하는 데 썼다. 고리의 채권자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각국의 은행, 스페인 은화가 세계를 뒤덮었다. 콜럼버스 이전 부의 중심은 아시아였다. 1인당 소득, 군사력, 평균 수명 등 모든 면에서 유럽을 앞섰다. 은이 기존의 위상을 뒤바꿔 놓았다. 아메리카의 은이 ‘스페인이란 노즐’을 통해 분사되면서 증기기관이 탄생했다.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강력한 대포와 무기가 개발되었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탄생했다. 자본주의가 발흥했다. 여러 요인이 결합되어 벌어진 일이지만 아메리카의 은이 아니면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를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옛 조폐국과 대성당을 둘러본 후 하염없이 걸었다. 나는 길 위의 노동자, 여행지에 도착하면 10㎞ 이상 걷는 게 나의 일이었다. 나무로 만든 가게 간판들이 눈길을 끌었다. 대기업 간판도 마찬가지, 나무로 만든 ‘SAMSUNG’(삼성) 간판이라니!
걷다 보니 출출했다. 살테냐 가게가 있었다. 주문하며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살테냐랑 엠파나다랑 뭐가 다르죠?” 구운 군만두처럼 생기긴 마찬가진데 왜 다르게 부르는지 궁금했더랬다. “오래전 살타(아르헨티나 영토) 여자가 포토시에 와서 엠파나다를 팔았어요. 우리 입맛에 맞게 맵고 뜨끈한 육즙을 머금은 엠파나다를 만들었죠. 인기가 많다 보니 살테냐(살타댁)가 음식 이름이 되었어요. 살테냐 사 와라.” 강릉댁, 목포댁 하는 별칭이 음식 이름이 된 셈이었다. 살테냐를 베어 물었다. 야채랑 고기가 적절히 배합된 살테냐의 따끈하고 풍부한 육즙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정말 맛있었다.
허기를 채우고 발길을 옮겼다. 수업 마친 학생들이 활기차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곧 해가 질 텐데, 석양이 보고 싶었다. 토마스 프리아스 대학 내 높은 건물로 들어갔다. 중앙 계단을 올랐다. 한 층만 더 오르면 꼭대기인데 막혀 있었다. 망설이다가 혹시나 하고 문을 두드렸다. 서른 초반의 여자가 나왔다. 방이었다. 나는 창가에서 사진을 찍어도 될지 물었다. 뒤돌아서 중년의 교수에게 묻더니 허락했다. 창문 넘어 세로 리코가 보였다. 촬영 후 돌아서는데 교수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내 소개를 하자 교수가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유럽인은 저 산에서 나온 은으로 대서양 지나 유럽까지 다리를 놓을 정도였다고 말하지. 이곳 포토시 사람들은 다르게 말해. 저 산에서 죽은 사람들의 뼈로 다리를 놓으면 유럽에 닿을 정도였다고.” 그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으며 ‘두 번째 세계’로 빨려들었다.
세로 리코의 광산을 소재로 그린 거리 벽화. 노동효 제공
스페인 은화를 찍어냈던 조폐국 중정. 노동효 제공
“잉카 시절에 미타 관습이 있었어. 연중 일정 기간 성벽, 수로, 다리를 놓는 노역 의무였지. 다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기에 당연시했어. 가장을 잃은 가족, 병든 노인, 전쟁터 나간 병사를 대신해서 농사를 짓는 것도 미타였지. 스페인 침략자는 미타를 이용해 강제노역을 시켰어. 하루 16시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했지. 돌을 깨고 무거운 광석을 쉴 새 없이 굴 밖으로 옮겼어. 처음엔 용광로, 나중엔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수은을 이용했어. 굴이 무너져 죽고, 수은에 중독되어 죽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은 폐가 망가져 죽었어. 저 산이 잡아먹은 사람이 몇인 줄 아냐? 800만 명이야.”
〈수탈된 대지〉에서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말했더랬다. ‘이 세계에 가장 많은 것을 제공하고도 가장 조금밖에 가지지 못한’ 포토시는 여전히 ‘아메리카 식민지의 절개된 상처고 살아있는 고발장’이라고. 교수가 입을 다물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에게 깊이 감사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안데스산맥을 넘어가고 있었다. 석양에 물든 세로 리코가 피를 칠한 듯 붉게 물들었다.
한국에도 ‘사람을 잡아먹는 산’이 있다. 하루 평균 6명을 잡아먹는다. 추락, 끼임, 깔림, 무너짐, 폭발, 파열, 질식, 감전, 중독 등 매년 산업재해(질병 포함)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2천여명, ‘사람을 잡아먹는 산’의 입을 막기 위해 제정한 법이 ‘중대재해처벌법’이다.
노동효 여행작가
화성으로 떠나기 전 인류 삶과 지구 풍경을 톺아보기 위해 여행하는 ‘길 위의 노동자'. <남미 히피 로드>, <세계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 빠이>, <푸른 영혼일 때 떠나라>,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