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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절반은 맛”이라고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은 말했다.(정확히는 그런 제목의 책을 썼다.) 봄 하면 떠오르는, 입맛 돋우는 제철음식을 소개해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미더덕에 취했던 3월의 마산 앞바다 풍경, 울진 후포항의 아침을 깨운 대게 위판장의 시끌벅적한 소리, 그리고 어릴 적 엄마 손 잡고 오른 동네 뒷산에서 뜯던 쑥 냄새였다. 오감으로 기억하는 흐뭇한 과거를 떠올리다 보니 ‘음식의 절반은 추억’이라 바꿔 말해도 될 성 싶다.
미더덕은 아귀찜이나 해물찜 같은 데 흔히 들어가던 재료니 먹어본 건 꽤 됐지만 제대로 맛을 안 건 불과 3~4년 전이다. 지방 출장 중 창원의 한 작은 포구에서 점심을 먹었다. 미더덕 전문점이었다. 때는 3월 중순. 마침 미더덕이 제철이라 했다. 동행한 선배가 미더덕회를 시키며 “바다에 피는 봄꽃”이라 추어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접시에 담긴 울긋불긋한 자태가 마치 꽃그림을 담은 작은 액자 같았다. 한 점 입에 넣으니 고소하고 달큰한 게 쌉싸래한 뒷맛까지 제법 입체적이었다. 비강을 흥건히 채우는 독특한 바다향도 일품이었다.
이어 미더덕덮밥을 주문했다. “이거 한 번 먹으면 담부터 멍게덮밥은 못 먹어.” 선배의 그 말도 사실이었다. 멍게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차원이 다르다고 할까. 들어가는 재료와 식감은 비슷한데 훨씬 깊고 그윽한 맛이 났다. 봄에 물 오른 진달래꽃을 따 입에 물고 계절의 달콤한 기운을 느낀 적 있다. 부끄럽지만 바닷것에서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상상해본 적 없었다. 그날 미더덕 한 입엔 남해에서 막 건져낸 새봄이 들어있었다. 갯내가 밴 그 봄은 입 안에서 부드럽게 몸을 뒤틀다 밥상 위로 은은히 퍼져나갔다.
미더덕은 순우리말로 ‘바다에서 나는 더덕’이란 뜻이다. 거무튀튀한 색에 울퉁불퉁한 겉껍질은 정말 방금 캐낸 더덕을 닮았다. 미더덕은 주로 찜이나 찌개 요리의 맛을 내는 부재료로 많이 쓰는데, 산지 주민들은 회나 무침은 물론 전도 부쳐먹는다.
내가 점심을 먹은 곳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고현마을이었다. ‘미더덕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마을을 지나는 도로 이름조차 ‘미더덕로’다. 주민 300여명의 이 작은 마을에서 국내 미더덕 생산량의 70%가 난다. 수온과 수심, 유속이 미더덕 생장에 적당하고 플랑크톤 등 먹이도 풍부해서다.
해마다 봄이면 고현마을의 몇몇 미더덕 식당에 관광객이 몰린다.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의 기준은 ‘그 식당 음식을 맛보기 위해 일부러 여행을 떠날 만한 곳’이라 들었다. 그런 기준이라면 고현마을의 미더덕식당들에도 당장 미쉐린 별 2~3개쯤 줘야 하지 않을까. 요즘 들어 부쩍 더 짧게만 느껴지는,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말이다.
산지에서 푸짐하게 즐기는 대게와 홍게. 김형규 제공
갑각류를 유난히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대게를 최고로 친다. 달달하고 감칠맛 도는 살맛도 좋지만 꽃게나 킹크랩, 랍스터 등 다른 녀석들에 비하면 살을 발라먹기가 압도적으로 편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단점은 너무 비싸다는 것인데 산지에 가면 그래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배불리 먹을 수 있다. 경북 울진 후포항을 종종 찾는 이유다.
시기도 딱 이맘 때가 좋다. 대게는 금어기가 연중 절반이다. 12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만 조업이 가능하다. 수온이 낮을수록 대게의 살이 오르는데, 바다의 온도는 육지보다 변화가 더디기 때문에 2월부터 3월까지가 대게가 가장 맛있을 때다.
위로는 강원도 고성·속초부터 아래로는 경북 포항까지 동해안 전역에서 대게를 맛볼 수 있는데 굳이 울진을 찾아가는 건 대게잡이 역사와 규모에서 국내 최고를 다투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격도 좋은 편이다. 후포항 일대에선 매년 2월말 즈음 대게축제도 열린다.(올해는 2월 23~26일 개최) 조업철엔 매일 아침 후포항 위판장에서 열리는 대게 경매를 구경할 수 있다.
영덕 강구항, 포항 구룡포항 등과 나란히 놓이는 국내 최대의 대게잡이 항구답게 후포항 주변에 대게 전문점이 많다. 대부분 갓 잡아온 대게를 커다란 무쇠 가마솥에 쪄서 상에 낸다. 대게는 대단한 요리법이 따로 없다. 산지에서 바로 쪄먹는 맛을 이길 방법은 없다. 식당에선 게 다리에 칼집을 내서 준다. 살짝 손으로 비틀기만 하면 살이 쭉 빠져나와 먹기 편하다. 게살을 다 발라먹고 나면 남은 살과 내장으로 볶음밥을 만들어 게딱지에 담아 내준다.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거부할 수 없는 바로 그 맛이다.
후포항 5일장에 가면 다리 하나둘 떨어진 대게를 저렴하게 살 수도 있다. 대게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홍게(울진에선 붉은대게라고 부른다)도 있다. 대게보다 달착지근한 맛이 덜하다고 하지만 일반인이 구분하기 힘든 수준이다. 라면 등 국물 요리엔 홍게가 낫다는 평가도 많다.
봄에 먹는 제철음식으로 제일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도다리쑥국이지만, 이것만큼 오해(?)가 큰 음식도 없다. 흔히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고 하지만, 도다리(문치가자미)의 제철을 봄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도다리 금어기는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진데, 이때가 도다리 산란기다. 봄이 되는 3~4월이면 산란을 마친 도다리의 기름기가 빠지고 살은 푸석해진다. 횟감으로 쓸 수준이 아니라서 국을 끓여 먹은 것이 도다리쑥국이다. 이런 유래를 모른 채 도다리쑥국이 지역의 제철음식으로 유명세를 타다 보니 해마다 봄이면 서울의 식당에서 도다리 대신 가자미를 넣은 가짜 도다리쑥국을 파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물론 맛은 그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봄 음식으로 계속 소비를 하려면 최소한 이름이라도 ‘쑥도다리국’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국의 맛을 결정하는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향긋한 쑥이니 말이다. 도다리 대신 광어, 가자미, 도미 등 어떤 흰살 생선을 넣어도 좋다. 소금이나 된장으로 살짝 간을 하고 무와 파, 마늘, 고추 썰어넣어 한소끔 끓여내면 그만이다. 봄내음 가득한 쑥국 맛이 주는 기쁨은 변함 없다.
쑥은 향으로 먹는 음식이다. 내겐 늘 어린 시절을 소환하는 식재료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뭐든 사먹는 게 집에서 해먹는 것보다 빠르고 편리하고 심지어 경제적으로도 유리한 선택이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일고여덟살 즈음 햇살 나른한 오후에 엄마 따라 뒷산에 올라 쑥을 캤다. 겨우내 얼었다 녹은 땅을 비집고 올라온 여린 순만 골라 주머니에 담았다. 그걸로 집에서 만들어 먹은 쑥떡 맛을, 그 강렬한 향을 아직 잊지 못한다. 올봄에는 가족들과 오랜만에 쑥떡 맛을 나눌 참이다.
김형규 홍신애요리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