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내린 캡스턴 벨트 교체를 위해 분해한 타스캄 34B 내부. 녹음재생 헤드 아래쪽 검은 쇠 뭉치(점선 표시)가 캡스턴에 회전력을 전하는 휠이다.
지난 6일 당근마켓에 눈길을 사로잡는 물건이 올라왔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모은 LP 일괄판매’였다. 물량이 대단했다. 엘피(LP) 2만1000여장, 100년 넘은 축음기판 1300여장, 시디(CD) 5000장, 다수의 스피커와 진공관 앰프…. 판매자가 올린 사진은 박물관을 방불케하는 아우라를 풍겼다. 16년 동안 짠내 수집으로 엘피 1천여장, 1대의 진공관 라디오, 릴 투 릴 테이프 리코더(오픈 릴 오디오) 등 몇 대의 오디오를 수집한 나는 욕심이 생겼다.
판매자가 적어놓은 가격은 ‘999,999’원이었다. 가격을 특정할 수 없을 때 1234원, 999원, 이런 식으로 적는다는 걸 알지만 “부담 없이 연락주세요!”라는 문구에 용기를 냈다. 야무진 횡재의 꿈을 품고 “대략 얼마를 생각하시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일괄 8억 생각합니다.” 억 소리가 났다. 8억원? 엘피 한장당 1만원을 넘지 않게, 오디오는 고물상과 재활용센터 전파사를 전전하며 보물찾기하듯 짠내 폴폴 수집활동 해온 나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현실을 다시 직시했다. 당장 제주 출장길에 ‘당근질’한 오픈릴 오디오를 고치기 위해 필요한 부품인 핀치롤러를 구하러 다니다 동네 전파사에서 10만원이라는 가격에 홀려 덜컥 사들인 새 근심, ‘타스캄 34B’를 자가 수리해야 한다. 지난 3월18일치에 오픈릴 수집기를 쓴 뒤 토요판부에선 나와 이문영 기자 2명을 제외한 7명 기자가 다른 부서로 옮겨갔다. 전임 홍석재 부장을 비롯한 부원들과 약식 송별회 때 “타스캄 34B를 완벽하게 자가 수리하면 속편 기사를 쓰고, 우리 집에서 청음회 겸 송별 파티를 열겠다”고 공언했다.
녹아내린 벨트…청계천 상가에서 대체품 ‘득템’
아날로그 오디오 수리법을 배운 적 없는 나에겐 힘겨운 수수께끼였다. 왜 재생 버튼을 누르면 한 방향으로 회전해야 할 릴 테이블이 오른쪽은 뒤로, 왼쪽은 앞으로 도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용자 매뉴얼을 구해 봐도, 나라 안팎의 수많은 유튜브 영상을 찾아봐도 이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정상 작동하는 오픈릴 ‘아카이 1800D-SS’와 비교해 봤다. 아카이는 재생 때 좌우 릴 테이블이 한 방향, 즉 왼쪽으로 회전했다.
문득 릴 테이프 속도를 조절하는 금속 기둥인 캡스턴을 돌려주는 벨트가 끊긴 게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캡스턴이 고무바퀴인 핀치롤러와 밀착하며 릴 테이프를 꽉 물고 앞으로 돌리면 왼쪽 릴 테이블이 회전 방향을 바꿔 앞으로 돌든지, 릴 테이프가 결딴나든지 어느 쪽이든 결론 날 것 같았다.
유튜브를 틀어 놓고 수없이 도상 연습했다. 지름 1.5㎜ 초소형 육각 렌치까지 마련했다. 수많은 나사못 가운데 일(一)자도 십(十)자도 육각도 아닌 특이한 모양부터 난관이다. 오랜 세월 탓에 아예 풀리지 않는 것도 있었다. 나사못을 다 풀어내기까지 이틀을 고민했다.
드디어 겉판을 열었을 땐 마치 인간의 뇌를 여는 신경외과 전문의 같은 심경이었다. 릴 테이프에 전기 신호를 줘 음원을 삭제, 녹음, 재생하는 핵심부인 헤드까지 분해하자 타스캄 34B의 아름다운 속살이 드러났다. 얇은 철선과 섬유질 선, 스프링, 자석, 균형추, 모터, 고무벨트 등이 정교하게 맞물린 기계 시스템은 경외감을 느낄 만했다. “누가,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지!” 감탄이 터져 나왔다.
캡스턴을 돌리는 모터는 살아 있었다. 다행이다. 예상대로 그 모터에서 캡스턴 휠로 동력을 전달하는 고무벨트가 모르타르처럼 녹아 눌어붙어있다.
알코올로 모터와 휠에 묻은 찌꺼기를 닦아냈다. 작업대처럼 쓰는 거실 탁자, 장갑, 옷까지 얼룩졌다. 그런데 녹아내린 벨트의 길이, 두께, 인장강도 등을 알 수 없었다. 재래식으로 해결했다. 모터와 휠까지 한 바퀴 도는 길이를 케이크 상자를 묶는 장식끈으로 쟀다. 39.5㎝. 녹아내린 벨트 가운데 그나마 형태를 유지한 약 4㎝ 정도를 표본으로 확보해 청계천 벨트 제작 상가를 찾았다.
“그런 건 안 만든다“ “인장강도가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그렇게 헤매다 이번에도 귀인을 만났다. 종로 세운상가 인근 한 고무벨트 제작자는 내가 가져간 녹아내린 4㎝ 표본의 두께, 폭 등을 정밀하게 잰 뒤 “시간이 좀 걸리지만 만들 수는 있다”고 했다.
캡스턴 벨트를 대체한 일제 고무밴드와 육각 렌치 등 분해 도구. 청계천 상가에서 얻은 고무밴드가 타스캄 34B를 살렸다.
그때 내 눈은 상점 한 귀퉁이에 놓인 노란색 고무밴드에 박혔다. 폭은 얼추 비슷한데 길이는 훨씬 짧았다. 주인은 “일제 고무밴드인데, 내구성이 아주 좋아요. 공짜로 줄 테니 한번 걸어보세요. 돌아갈 수 있고, 안 돌면 전화주세요”라고 했다. 이런 고마울 때가…. 집에 왔지만 근심은 여전했다. 20㎝가 될까 말까 한 고무밴드의 인장력이 너무 강해 모터에 무리가 갈까 걱정했다. 실내 자전거 핸들에 걸고 하룻밤 내내 밴드를 늘렸다. 아내가 또 한마디 거든다. “그게 뭐라고?,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겠냐?” 나도 이래야 하나 싶었다.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이걸로 캡스턴을 돌린다 치자, 그래서 릴 테이프를 캡스턴과 핀치롤러와 꼭 물고 앞으로 돌린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내가 손으로 잡고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을 만큼 고속으로 역회전하는 오른쪽 릴 테이블이 앞으로 돌까? 십중팔구 릴 테이프가 끊기고, 자칫 캡스턴 모터와 릴 테이블을 돌리는 모터가 반대 방향으로 서로 당기다 타버릴 것 같았다.
고물로 둘 수는 없는 일, 결단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뒤로 돌던 오른쪽 릴 테이블이 앞으로 회전한다. 더욱이 릴 테이프를 되감을 때 특정 위치를 찾아가는 ‘제로리턴’ 기능까지 작동했다. 멈춤 설정한 지점 인근에 오면 오른쪽 왼쪽 릴 테이블이 시계추처럼 주거니 받거니 앞뒤로 돌면서 정확한 위치를 찾아 정지했다. 명성 자자한 전문가용 오픈릴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고무밴드 하나로 이런 기능까지 회복하다니 성취감이 남달랐다. 이런 맛에 짠내 풀풀, 자가 수리의 수고로움을 감수한다. 녹음·재생도 완벽했다. 손 선풍기처럼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며 초고속으로 릴 테이프가 되감길 때면 속이 후련했다.
이번에도 ‘소 뒷걸음질하듯’ 성공했지만 아날로그 오디오 수리 기술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욕망은 더욱 커졌다. 지금까지 여러 곳을 알아봤다. 세운상가 오디오 수리 장인들이 모인 ‘수리수리협동조합’도, 동네 전파사 수리 기사도 모두 손사래 쳤다. 모두 자신이 그만두면 아날로그 오디오 수리 기술의 명맥이 끊길까 걱정했다. 그러나 “돈도 안 되는 데, 배워 뭐하게?” “하루 이틀에 끝날 게 아닌데. 10년은 가르쳐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고 했다. 외국에선 자가 수리가 유행이라고 한다. 우리도 그런 날이 올까? 장인들에게 다시 호소한다. “전 이런 것까지 해 봤어요.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가르쳐 주실 분 연락 주세요.”
글·사진 신승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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