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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십자성이 빛나고 있을 밤하늘은 칠흑처럼 검었다.
나는 텐트의 지퍼를 열어 그물망 사이로 바깥을 가늠하려 애썼다. 달도, 별도 빛을 잃었는지 눈앞에 먹지를 댄 듯 캄캄했다. 사위(사방의 둘레)는 냉담한 정적에 싸여있었다. 그 정적을 찢으며 사나운 짐승의 포효처럼 바람이 울었다. 이 땅의 주인이 자신임을 만인에게 선언하듯. 울부짖는 바람 소리에 포위된 밤이었다. ‘이곳은 아직 그대로’라는 사실에 안심이 되는 마음 너머로, 마침내 이 먼 곳까지 다시 돌아왔다는 실감이 밀려들었다. 여기는 파타고니아였다. 지구 끝의 텅 빈 공간. 광포한 자연의 힘이 살아있어 인간을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땅. 이곳에 한 번 발을 디딘 후 내 몸에는 나침반이라도 새겨졌는지, 어디선가 파타고니아란 단어가 들려오기만 해도 몸을 틀게 되곤 했다.
파타고니아라는 이름은 마젤란 원정대가 원주민 테우엘체족의 큰 키를 보고 ‘파타곤(거인)’의 땅이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이 명칭에는 정확한 지리적 경계가 없다. 그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남위 40도 부근 콜로라도강 이남 지역이라고만 칭할 뿐. 한반도 면적의 5배쯤 되는 이 거대한 땅은 서쪽으로는 태평양, 동으로는 대서양을 두고, 안데스산맥과 고원과 평원, 빙하와 피오르 해안을 두루 품고 있다. 이 땅에 매혹된 이유를 묻는다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그 거친 야생성 때문이라고 답해야 하나. 마침내 지구 끝까지 와버렸다는, 더는 갈 곳이 없다는 고립감 때문일 수도. 스마트폰이 터지지 않고, 날씨는 사납고, 사람보다 양들의 수가 더 많은 곳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안도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땅에는 어떤 체념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에도,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휘어 자라는 나무들에도, 가혹한 환경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순응의 태도가 배어있었다. 냉혹한 바람과 어지러울 정도로 달라지는 하늘의 색. 그 공기와 습도와 온도를 한 번 겪고 나면 모든 것은 낙인처럼 몸과 영혼에 새겨졌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지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거나 끝없이 모양을 바꿔가며 흘러가는 구름에 시선을 앗기거나 하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쯤은 쉽게도 흘려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곳. 그저 다다랐다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주는 곳이었다.
12년 전, 파타고니아의 모든 것을 내 안에 새기겠다며 캠핑 장비를 짊어지고 석 달을 떠돌았다. 짧으면 사흘, 길면 열흘을 텐트와 슬리핑 백, 식량을 담은 배낭을 메고 혼자 걸었다. 가을이 시작된 터여서 날씨는 나빴고, 바람은 사나웠다. 외롭고 고된 여정이었지만 내 몸과 정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가장 멀리까지 나아갔던 시간이었다. 그러니 올해 1월 나의 여행 친구들인 ‘방과 후 산책단 남미’를 꾸릴 때 핵심은 파타고니아 트레킹이었다. 내가 남미에서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장소가 이곳이었다. 이 바람과 하늘 아래 함께 걷고 싶었다. 혼자서 감탄하고, 혼자서 감동했던 풍경을 좋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영혼에도 이 땅의 기운이 스며들기를 바랐다. 당연히 33일의 전체 일정 중 보름 가까이 파타고니아에 할애했다.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 아르헨티나 빙하국립공원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와 엘찰텐, 우수아이아가 우리가 걸을 곳이었다. 우리는 먼저 칠레로 향했다. 멀리서 파타고니아의 탑들이 보일 때, 내 발바닥이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12년 전에는 일주 코스를 걸었는데, 이번에는 그보다 짧은 더블유(W) 트레일이었다. 날씨는 파타고니아답게 변덕스러웠다. 가는 비가 흩뿌리다가 햇살이 너울거리다가 다시 비가 쏟아졌다. 매운맛부터 보여주겠다는 듯 바람은 매섭게 불었다. 그래도 첫날이라 다들 컨디션이 괜찮았다. 다음날은 바람이 술 취한 망나니의 칼춤처럼 불어댔다. 과연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폭풍)에 영감을 줄 만한 바람이었다. 그날 트레킹을 하던 서양 남자가 배낭을 멘 채로 날아가 바위에 부딪혀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다. 우리는 몸을 낮추고 허벅지에 온 힘을 다 싣고 스틱에 의지해 걸었다. 몸무게가 가볍다고는 말할 수 없는 나조차 휘청거리며 걸어야 했다.
그레이 빙하로 가는 길에는 2011년의 화재(불법 야영을 하던 이스라엘 청년이 일으킨 화재로 이 국립공원의 3분의 1이 탔음)로 검게 타죽은 나무의 메마른 몸피가 가득했다. 그 나무들은 내 안에서 분노와 슬픔의 감정이 일렁이게 했다. 격렬한 감정을 어루만지듯 에메랄드 빛깔의 호수는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레이 빙하가 호수를 향해 한껏 몸을 내밀고 있었다. 기슭에는 부서진 유빙이 밀려와 있었다. 청백색의 얼음 조각과 옥색 물빛의 대조가 서늘했다. 부서진 얼음 조각을 손에 들고 사진을 찍는 일행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한반도에는 빙하가 없으니 어떤 이에게는 첫 빙하일지도 몰랐다.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비글 해협에서 보이는 가마우지들의 모습.
이번 트레킹에서 가장 힘든 날은 셋째날이었다. 파이네 그란데 산장을 출발해 이탈리아노 야영장까지 간 후, 산장에서 받은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다. 퍽퍽한 샌드위치의 맛은 염소가 종이를 씹을 때 느낄 법한 맛 같았다. 야영장에 배낭을 남겨두고 브리타니코 전망대를 향해 걸었다. 고즈넉한 숲길을 계곡 물 흘러가는 소리가 채우고 있었다. 이 국립공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꼽히는 곳답게 수려한 풍경이 이어졌다. 사방을 호위하듯 둘러싼 바위의 웅장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날씨도 쾌청했고, 바람도 숨을 돌리는지 잔잔했다. 다만 내내 걷기 힘든 너덜바위가 이어져 체력이 약한 이들은 피로가 쌓여갔다. 내려올 걸 왜 올라가야 하느냐, 그만 가면 안 되냐는 농담 섞인 푸념이 처음으로 나왔으니. 못 들은 척 발을 옮겼지만 남은 날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프란세스 야영장의 텐트 안에서 바람 소리에 내내 몸을 뒤척인 다음날, 칠레노 산장으로 향했다. 검은 몽돌이 깔린 호숫가를 따라 걸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호수의 물결은 솟구치는 파도를 만들며 밀려와 흰 포말을 쏟아냈다.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칠레노의 산장지기가 다음날은 라스 토레스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기에 완벽한 날씨라고 예고했다. 3대가 아니라 7대쯤 덕을 쌓으면 이곳의 일출을 한 번쯤 볼 수 있을까.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선물이 예고된 기분이었다. 새벽 3시 반에 산장을 나섰을 때 밤하늘에는 별빛이 무성했다. 야간 산행 경험이 없는 이들이라 노심초사하면서도 밤하늘의 아름다움에 홀려 자꾸 고개를 들게 되는 길이었다. 호숫가의 바위틈에 앉아 바람을 피하며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장미꽃이 피어나듯, 붉은 잉크물이 번지듯 거대한 바위 봉우리들이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산을 내려왔다. 토레스델파이네와 작별할 시간이었다.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로 향했다. 남극과 북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빙하 중 가장 아름답다고 꼽히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가 우리의 첫 아르헨티나 트레킹 장소였다. 폭이 5㎞, 길이가 30㎞, 높이는 60m에 이르고, 매일 아르헨티노 호수를 향해 2m씩 이동하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 하네스를 차고 밧줄을 걸며 산을 올라 빙하 깊숙이 들어갔다. 등산화에 아이젠을 끼우고 빙하 위로 올라서니 사위가 온통 푸른 흰 빛이었다. 단단한 얼음의 벽이 짙푸른 하늘 아래 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가이드가 데려간 싱크홀의 물빛은 녹아내린 빙하의 푸른 피 같았다. 순수하고 투명한 블루의 세계였다.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물속으로 발을 디디게 될 것만 같았다. 빙하 트레킹의 마지막은 여전히 낭만적이었다. 빙하의 조각을 넣은 위스키 잔을 손에 들고 멀어지는 빙하를 향해 건배했다.
아르헨티나 빙하국립공원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가 광활하고 장엄하다면 아르헨티나의 엘찰텐은 화려하고 우아하다. 토레스가 우리의 지리산 같다면, 엘찰텐은 설악산이랄까. 버스가 엘찰텐 마을로 들어서니 지평선 너머 아득히 솟은 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구에서 가장 오르기 어려운 수직 직벽으로 암벽 등반가들의 꿈이기도 한 세로토레(3102m)와 등산복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로고가 된 엘찰텐 봉우리(3405m. 피츠로이라고도 불림)가 지평선 끝에 신기루처럼 걸려있었다. 엘찰텐에서는 바람도, 구름도 없는 맑은 날이 사흘간 이어졌다. 계획했던 엘찰텐의 트레일 세 곳을 다 함께 걷고 싶었지만 몇명은 체력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엘찰텐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로스트레스 호수를 향해 가던 날, 세 명이 숙소에 남았다. 너덜바위의 가파른 길을 오르는 길고 고된 시간을 견디니 그 모든 고생을 보상받는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수 앞에서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온갖 포즈로 사진을 찍는 이들을 보며 나는 마을에 남아있을 이들을 떠올렸다. 단체 사진을 찍을 때 빈 자리가 따끔거렸다. 이 땅을 사랑했던 칠레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이곳에서는 정해진 계획을 짜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했다. 비록 여기까지는 함께 오지 못했지만 그들에게도 저마다의 파타고니아가 새겨졌을 터였다. 계획이나 의도대로 되지 않는 땅에서 지나친 욕심을 부린 내가 어리석을 뿐.
엘찰텐에서 마지막으로 향한 파타고니아는 불의 땅(Tierra del fuego) 우수아이아. 지구 최남단 도시 우수아이아의 포구는 ‘땅끝마을’ 도장을 찍는 이들로 붐볐다. 남위 54도인 이 도시에서 남극까지는 겨우 1000㎞. 마침내, 여기까지 다다랐다. 도착했으나 끝내 다다르지 못한 곳이라고 세풀베다가 말했던가. 우수아이아 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은 엘찰텐이나 토레스델파이네와는 달랐다. 힘을 뺀 듯 순하고 부드러운 아름다움. 우리도 느긋하게 산책을 즐겼다. 이곳에서 화원을 운영하는 임영선씨의 농장을 방문해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작은 배를 타고 비글 해협을 돌며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에서 아휘(량차오웨이:양조위)가 슬픔을 묻은 등대를 바라보기도 하면서.
파타고니아를 떠나던 날, 비행기 창 너머 아득히 보이는 광활한 땅을 눈으로 좇았다. 한 번 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앨런 긴즈버그의 시처럼 너무 많은 소음과 너무 많은 차들과 너무 적은 나무에 지치는 날, 나는 다시 이곳을 향해 긴 비행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한 번 영혼에 새겨진 파타고니아의 바람은 쉽게 잠들지 않고 나를 흔들어댈 테니까.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