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와 함께 야생동물을 찾아보는 토르투게로 카누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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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회색 구름 사이로 햇살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분홍색 꽃송이들이 공중에 떠있었다. 잎도 없는 가지마다 아기 얼굴만 한 분홍 꽃을 잔뜩 매단 나무들이 도시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 로블리 사와나라는 이름의 꽃나무였다. 입가에서 굴러가는 발음마저 사랑스러웠다.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길 내내 나무와 꽃이 무성했다. 도심에 가까워져도 새들의 울음소리가 소란스러웠다. 도시를 감싸듯 펼쳐진 완만한 능선의 산들이 조금씩 어둠에 묻혀갔다. 늙은 보리수 나무들이 몸을 서로 얽은 채 도로 위에 묵상하듯 서있었다. 다시 혼자 여행을 시작한 나를 이 나라의 자연이 위로해주는 듯 했다. 올해 2월 방문한 이곳은 코스타리카.
‘에코 투어리즘’이라는 단어로 여행자를 끌어들이는 나라다. 생태계와 자연을 파괴하지 않으며 즐기는 관광이라니, ‘녹색 성장’이라는 단어만큼이나 모순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런 여행이 가능한 나라가 있다니! 당연히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저예산 배낭여행자가 감당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포기했다.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와야지 하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적으로는 비슷한 상황이다. 다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기에 마음이 끌릴 때 가야 한다는 사실을. 급격한 기후위기, 50대 중반이 되어가는 나이, 이런 것들도 조금은 나를 조급하게 만든다. 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보고, 걷고 싶은 곳을 마음껏 걸을 수 있는 시간과 체력, 열정이 나에게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기에.
수도 산호세에 큰 짐을 맡겨놓고, 바로 남동쪽 카리브해 바닷가를 향해 내려갔다. 푸에르토 비에호. ‘옛 항구’라는 이름을 지닌 이곳의 바다는 야생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야자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고는 텅 빈 해변을 맨발의 여인 두셋이 걷고 있을 뿐. 파라솔 하나 없이 자연 그대로인 바닷가의 마을은 소박하지만 배낭족이 좋아할 만한 ‘바이브’는 다 갖췄다. 카리브해를 눈앞에 둔 카페들이 있고, 해변에는 젊은 연인들이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호스텔의 평균연령 확장자로, 이 동네 패션 테러리스트로, 혼자 등산복을 입은 채 바닷가를 거닐었다.
이곳은 바다를 즐기러 온 게 아니라 재규어 구조센터 때문에 찾아왔다. 다양한 야생동물을 구조해 치료한 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곳이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아침에 찾아간 구조센터는 궂은 날씨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하루에 두 번 있는 가이드투어는 꽤 인기가 높아 예약이 자주 마감된다고 했다. 우리의 영어 가이드는 미국인 조니. 9년째 코스타리카에 살고 있고, 여기서 세 번째 자원봉사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작년에 구조한 동물은 모두 966마리. 380마리가 야생으로 돌아갔고, 119마리는 야생 생존 가능성이 희박해 이곳에 남았고, 467마리는 죽었다. 그날의 주인공은 시작하자마자 등장했다. 이곳 숲에 사는 야생 나무늘보 한 마리가 새끼를 품에 매단 채 나무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일제히 휴대폰을 꺼내 촬영을 시작했다. 마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후보라도 마주친 듯한 분위기였다. 나무늘보는 저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느릿느릿 나무 밑동까지 내려와 볼 일을 봤다. 그러더니 진흙탕이 된 길을 기어 다른 나무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하루 평균 이동 거리가 37m에 불과하고, 평균 시속 240m의 속도로 이동한다는 느림보에게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나무늘보는 제 속도로 끈질기게 기어가더니 새로운 나무를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무 그늘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목을 있는 힘껏 늘이고 나무늘보를 지켜봤다. 내가 코스타리카에 온 이유가 나무늘보를 보기 위해서였는데, 사흘 만에 나무늘보를 만날 줄이야. 이 행운이 믿기지 않았다.
게으름뱅이의 대명사인 나무늘보는 여러 면에서 나를 매혹한다. 우선은 나무늘보의 삶 자체가 게으른 내가 꿈꾸는 최고의 삶이다. 여행에 대한 지독한 갈망으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20년째 떠돌며 사는 처지라, 내게 나무늘보는 정착하는 삶에 대한 어떤 은유 같았다. 하루 15시간을 자고, 일주일에 한 번 나무에서 내려오는, 움직임에 있어서 극단적인 미니멀리스트.
무엇보다 나무늘보는 친환경적인 동물이다. 느린 속도의 생활방식을 선택해 가능한 적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신진대사율이 극단적으로 낮아 나뭇잎 몇 장만 먹어도 살 수 있고, 근육도 적고, 체중도 가벼워 에너지 소모량도 적다. 그 최소한의 움직임은 포식자로부터 살아남는 데도 유리했다. 6500만년 이상 나무늘보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밀인 셈이다. 나무늘보는 주로 나뭇잎이나 수액, 과일을 먹지만 소화하는 데 너무나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며칠 혹은 몇주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기도 한다. 출산, 수면, 짝짓기, 밥 먹기 등 삶 전체가 나무에서 이뤄진다. 나무늘보가 하는 가장 힘든 여행은 바로 일주일에 한 번 배변을 위해 나무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다. 이토록 지독한 정착민이 또 어디에 있을까.
나무늘보의 털에 자라는 녹조류는 보호색이 되어주고 몸의 털은 수많은 미생물, 곤충, 곰팡이, 나방과 딱정벌레들이 공생하는 집이다. 그들은 그 안의 해로운 진드기와 세균을 먹어치운다. 이렇게 다른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나무늘보는 서식지인 열대우림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원숭이나 다른 동물처럼 거주하던 숲이 벌목으로 사라지면 다른 숲으로 이동하지도 못하기에.
나무늘보에 한껏 정신이 팔렸던 시간이 끝나고, 조니와 함께 구조센터의 곳곳을 돌아보며 이 구조센터에 남게 된 동물들의 사연을 들었다. 악어과의 카이만을 예로 들자면 이름은 파초. 이 근처 정글 호텔로 신혼여행을 왔던 독일인 부부가 트레킹을 다녀와 화장실 문을 여니, 욕조에 이 녀석이 떡하니 들어앉아 있더란다. 건기에 물냄새를 맡고 거기까지 왔던 것. 이미 인간 세계에 익숙해진 상태여서 야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0년째 거주 중이다.
이곳에서는 야생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동물은 우리 같은 방문객이 접촉할 수 없다. 이곳이 집이 된 동물만 만날 수 있는 셈이다. 정부 지원이 전혀 없는 이곳은 입장료와 기념품 판매, 카페 수입으로 운영된다. 30명 남짓한 자원봉사자들의 도움과 함께. 가이드 조니는 투어를 끝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소 한 달 이상 머물 수 있는 자원봉사자가 필요합니다. 제가 약속 드릴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당신이 한달 예정으로 온다 해도, 최소 석달은 머물게 될 것입니다. 평생 간직하게 될 추억을 안고 이곳을 나가게 될 것이고요.” 그에게 이곳에서 세번째 자원봉사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동물을 구조하고 그들을 돌보는 일은 너무나 놀라운 경험이거든요. 자연계의 동물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인간의 행동은 바꿀 수 있어요! 동물과 인간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은 꽤 매력적이죠.” 3주간 코스타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내가 매일 놀란 지점이었다. 인간과 동물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토르투게로 카누 투어에서 포착된 악어과 동물.
다음으로 찾아갔던 토르투게로에서도 그랬다. 거북이 마을이라는 이름처럼 여름이면 바다 거북이가 알을 낳으러 오는 곳으로 일년 내내 비가 내린다. 연 강수량 6000㎜에 코스타리카에서 습도가 가장 높은 곳. 무엇보다 운하의 마을이라 도로가 없어 찾아오기 힘든 곳으로 악명 높았다. 내가 간 길만 짚어보자면 푸에르토 비에호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30분 뒤 리몬에 내려 택시로 15분 거리의 모인 항구로 이동했고 모인에서는 16인승 통통배로 갈아타고 4시간을 가야 했다.
이 보트가 재밌는 건 오는 내내 야생동물 탐사 가이드투어를 겸한다는 점. 이곳 생태계에 대해 지식이 해박한 가이드가 악어, 이구아나, 투칸, 왜가리, 백로, 하울러원숭이, 거미원숭이 같은 다양한 동물을 찾아내 배를 멈추고 설명해준다.
운하의 마을답게 좁아졌다 넓어지기를 반복하는 물길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열대의 우림에 깃들어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사람을 포함한)을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4시간의 보트 여행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선착장에서 카누에 올라탔다. 가이드 에릭은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에도 해박해서 투어 내내 설명이 이어졌다. 자기가 사는 지역에 더불어 사는 다른 생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줄 수 있는 삶은 얼마나 근사한가. 맹그로브가 울창한 그늘을 드리우는 운하의 한가운데 수중 정원 같은 곳에서 에릭이 배의 엔진을 껐다. 작은 악어 한 마리가 느릿느릿 헤엄쳐 가고 있었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숨을 죽이고 악어를 지켜봤다. 그 순간, 지구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터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마음을 흔들었다.
코스타리카는 아메리카 대륙 유일의 영세중립국이다. 70년 전 군대를 없애고 국내총생산의 8%를 교육에 투자해왔는데, 세계 평균인 4.8%의 두 배 가까운 수치다. 군대를 없앤 덕분에 환경을 지키는 일에도 더 많은 비용을 쓸 수 있었다. 1980년대 벌목과 축산업으로 국토의 20%까지 떨어졌던 숲의 비율을 51%까지 끌어올렸다. 그 중 절반 가까이가 원시림이다. 코스타리카 전체 국토의 25%가 국립공원인데 지구상 모든 나라 중 가장 높은 비율이다. 이 나라는 지구 면적의 겨우 0.03%를 차지하는데 지구 전체 생명체의 5% 종이 살고 있다니, 놀라운 생태 다양성이다.
게다가 이 나라는 수력 등 재생 가능한 자원으로 전력의 99%를 생산한다. 이 나라의 카를로스 알바라도 전 대통령은 2019년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을 보호하는 일은 경제와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우리의 관광산업은 환경보호로 인해 성장했다.” 맞는 말이다. 나도 ‘에코 투어리즘’ 때문에 이 나라에 와보고 싶었으니까.
코스타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며, 지속 가능한 나라로도 자주 꼽힌다. 복지와 평균 수명, 생태 발자국으로 측정되는 행복지수(HPI)는 2006년부터 4차례 조사됐는데, 코스타리카는 3차례나 1위에 올랐다.(심지어 서구에서 사용하는 자원의 4분의 1만 사용하면서!) 코스타리카는 어쩐지 나무늘보를 닮은 나라 같았다. 나무늘보가 제 몸에 이끼를 둘러 스스로 보호하듯 숲을 넓힘으로써 생존해가는 나라라는 점에서.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