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블랑 전경. 몽블랑을 등반하고 돌아오는 산악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옆 테이블을 노려본 지도 벌써 30분째. 정확히 말하자면 옆 테이블에 놓인 몽블랑 맥주. 차가운 물방울이 송알송알 맺혀있는, 설산 몽블랑이 영롱하게 그려진 맥주병. 딱 한 모금이면 타는 목마름이 말끔히 사라질 것 같은데…. 몽블랑을 눈앞에 두고 앉아 몽블랑 맥주 한 잔 마실 돈이 없다니! 1년에 100만명이 찾아오는 프랑스 샤모니에 환전소라고는 달랑 하나. 그것도 ‘200달러 한정’일 줄이야. 가진 유로를 최대한 아껴 쓰며 열흘을 버텨야 하니 당분간 맥주는 내게 사치품. 아쉬운 마음에 남의 맥주병을 빌려 사진만 한 장 찍었다.
2023년 6월의 나는 ‘알피니즘’의 발상지인 몽블랑(4810m)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나의 30대는 ‘알피니즘’이라는 단어에 꽂혀 지나갔다. ‘알프스에서의 등반’을 뜻하는 데서 시작해 ‘눈과 얼음으로 덮인 고산을 오르는 행위와 정신’으로 의미가 확장된 알피니즘. 그 단어는 내게 보상 없는 고행을 자처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위대함을 뜻했다. 육체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정신의 지평선까지 더불어 확장하고자 하는 거룩한 도전이었다.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지워버리는 마법의 단어였다. 그러니 알피니즘이 시작된 몽블랑은 내 오랜 외사랑의 대상이었다.
몽블랑 트레킹의 대표선수는 ‘투르뒤몽블랑’. 4000m급 봉우리 11개를 품은 몽블랑 산군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 168㎞의 트레킹으로, 줄여서 티엠비(TMB)라 부른다. 이 ‘인생 트레킹’을 하겠다면서 나만큼 준비 없이 찾아온 사람이 있을까. 보통은 1년 전에 산장 예약을 하는데 나는 두 달 전에야 검색을 시작했다. 당연히 대부분의 산장은 예약 종료. 결국 어떻게든 되겠지, 대충 수습하지 뭐, 이런 안락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문제는 내가 이곳에 오기 1주일 전에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몸이 좀 성치 않다는 점이다. 피를 나눈 남자에게 낙마 소식을 알렸더니 반응이 이랬다. “누나가 무슨 태조 이성계야, 몽테뉴야?” “근데 몽테뉴도 낙마했어?” “몽테뉴는 낙마 후 ‘수상록’에 육체와 의식의 분리 및 통합에 대한 사유를 남겨 후대 데카르트 철학에 영향을 줬다는데… 우리 누님은 얼마나 더 정치하고 웅혼한 철학적 논고를 남겨 세계 승마계와 생태학계, 의료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지 기대되네.”
의료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지, 지대한 돈을 갖다 바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초음파와 엑스레이 촬영 결과는 괜찮았다. 그런데 골반과 허리 사이에 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결국 샤모니에서 이틀을 쉬고 대망의 티엠비를 시작했다. 11일 일정 중 내가 산장에 머물기로 예약한 기간은 고작 5일. 거기다 허리까지 아프니 각오가 남다르게 가볍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지 뭐.
티엠비의 베이스캠프인 샤모니에는 헬멧과 밧줄을 배낭에 매단 이들이 가득했다. 그들 사이에 지도 한 장을 손에 든 내가 보였다. 산악가이드협회의 문을 밀고 들어서는 그녀. 홍조가 핀 얼굴로 산악가이드에게 쉬지 않고 질문을 던지고 있다. 타고난 체력만으로도 충분해 스틱도 들지 않았다. 복장은 허름하지만 기개는 높고, 열정도 뜨겁던 30대 후반의 나였다. 16년의 세월이 지나 더 좋은 등산복으로 무장하고, 스틱 두 개를 꼭 쥔 50대의 내가 이 거리에 서 있다. 흰머리만큼 몸무게도 늘었고, 체력은 떨어졌지만 여전한 점도 있다. 나에게 어울리는 곳에, 나와 닮은 이들과 함께 있다는 안도감. 몸을 써서 이뤄내는 느린 성취를 즐긴다는 점도 변하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나는 눈부시게 빛나는 설산을 바라본다.
샤모니 마을에서 소쉬르와 발마의 동상 너머로 몽블랑이 보인다.
햇살이 ‘정오 바위’(에귀유뒤미디)에 다다르면 점심을 차리고, ‘네 시 바위’(에귀유뒤구테)에 이르면 오후 차 한 잔을 즐기며 살아온 산간마을의 운명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1760년. 지적 열정으로 타올랐던 스위스의 지질학자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가 이 산을 처음 오르는 이에게 어마어마한 상금을 내걸었다. 26년 뒤 프랑스인 의사 미셸 가브리엘 파카르와 수정 채굴꾼 자크 발마가 상금의 주인공이 되었다. ‘보상 없는 스포츠’라는 알피니즘이 상금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점도, 자크 발마가 자신의 단독 등반을 주장하며 파카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점도 아이러니하다.
젊은 날의 나는 알피니즘의 역사를 그저 경외의 감정으로만 바라봤다. 이제는 알피니즘이라는 단어 뒤에 숨은 그림자가 보인다. 미혹과 공포의 대상이던 산이 정복의 대상으로 변하면서 식민지 경쟁하듯 산에 국기를 꽂아대기 시작했던 점.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대자연이 국가주의의 쟁탈 대상이 되었던 사실도. 어떤 방식으로, 어떤 루트로 오르느냐를 더 중요시하는 머머리즘(등로주의)을 유럽이 추구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미 오래전에 오르기만 하면 되던 시기(등정주의)를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아이가 어른이 되듯 자연스럽게. ‘정상 정복’ 같은 단어에 느끼는 불편함도 커졌다. 인간이 어떻게 산을 정복하나. 우리가 정복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나약한 자신에 불과할 텐데. 불확실한 자연 속으로 들어가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지배하고, 두려움을 통제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해내는 데 등산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럼으로써 육체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분투. 그런 마음으로 산을 오르는 이라면 그 산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산이라 해도 존경할 수밖에.
어쨌든 몽블랑 주변을 한 바퀴 돌겠다고 다시 찾아온 샤모니. 23㎞에 달하는 계곡을 따라 이어진 샤모니는 눈 드는 곳마다 장엄한 설산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각설탕 덩어리를 모아놓은 것 같은 ‘보송빙하’가 쏟아질 듯 가깝게 보이고, 절반쯤 녹아버린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봉긋하게 솟은 몽블랑은 손가락을 뻗으면 쓱 묻어나올 것 같다. 몽블랑을 응시하며 나는 배낭을 메고 신발 끈을 묶었다. 되는대로 해보는 티엠비.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늘 아름다운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고 믿었다. 산은 당연히 두 발로 걸어 올라야 하고, 험한 곳은 험하게 구르며 통과해야 한다고. 걷는 일에 있어서는 요령을 모르던 내가 첫날부터 격렬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다. “미쳤어? 벌써 편한 걸 찾기 시작하는 거야?” “정신 차려. 넌 이제 50대야. 허리가 그렇게 아픈데 아껴야 산에 더 오래 다니지.” 결국 늙은 내가 이겼다. 케이블카는 5분 만에 1811m의 벨뷔(전망대)까지 나를 올려줬다. 벨뷔에 내려 하늘을 보니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가득하다. 오늘은 2120m의 트리코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가이드북에 “날씨가 나쁘면 가지 말라”고 쓰여 있는 ‘변형 루트’다. 불안한 마음에 예약한 산장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요. 2시부터는 뇌우도 온다니 레콩타민으로 우회해서 오세요.” 결국 예정했던 길을 포기하고, 정상 루트로 선회.
휴대전화에 꽃 사진이 담기기 시작하면 나이가 든 거라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확실히 나이가 들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들꽃 때문에 자꾸 걸음이 느려졌으니. 오늘 머무는 산장은 온수 샤워는커녕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땀내 나는 몸을 씻지도 못하고 짐을 풀었다. 해 질 무렵 천둥 번개가 치며 강풍과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는 사이,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떴다. 밥 먹던 이들이 우르르 몰려나가 무지개를 바라보며 환호한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인간은 선한 존재라고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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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뉴 고개를 넘어 쿠르마유르로 향하는 트레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했다. 레콩타민 마을의 에이티엠(ATM)에서 유로를 찾았다. 원할 때 맥주 한 잔은 마시며 걸어야 할 게 아닌가. 지갑은 두둑해지고, 내 마음도 부풀어 올랐지만 적절한 거리에 빈 산장이 없어 한 시간 반 걷고 끝을 내야 했다.
다음 날은 6시간 반을 걷고 완전히 뻗었다. 허리가 제대로 고장 난 것 같았다. 1400m를 올라갔다가 900m를 내려오는 동안 내 신음소리가 산길을 뒤흔들었다. 그런데도 비현실적인 풍경에 사로잡혀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2512m 세뉴 고개에서 바라보는 하얀 산(몽블랑)과 ‘검은 바늘’이라는 뜻의 에귀유누아르 봉우리의 강렬한 대비. 저마다의 색으로 들판을 화려하게 물들인 야생화들. 스틱으로 찌르면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던 하늘. 초록의 능선을 캔버스 삼아 내키는 대로 칠한 흰 붓질 자국 같은 눈덩이들. 아이젠을 차고 조심조심 눈길을 걸어가는 트레커들의 알록달록한 옷차림. 하산할 것인가, 계속 갈 것인가 기로에 섰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했다.
전날 밤에는 하산 여부를 놓고 한산대첩을 앞둔 이순신 장군님만큼이나 고뇌했건만…. 아침에 일어나니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젊은 내가 늙은 나를 눌렀다. 결국 다시 배낭을 메고 4시간을 걸었으니. 비록 내 다리가 좀 짧기는 해도 튼튼하게 타고난 덕분에 어지간한 서양 남자들한테도 안 밀리고 걸어 다녔다. 아, 옛날이여…. 오늘은 모든 사람이 나를 추월해서 걸어갔다. 도로 건너 풀숲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달팽이의 속도랄까. 오르막에서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 기개를 발휘하느라 분투했지만, 장엄한 풍경에 취해 아픔마저 희미해지던 길이었다.
이탈리아 쿠르마유르에서 프랑스의 에귀유뒤미디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
어느새 티엠비의 절반을 돌았다. 긴 하루였다. 꼬박 12시간 만에 산장에 도착했으니.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왔지만 다시 이탈리아 쿠르마유르에서 케이블카로 프랑스의 에귀유뒤미디까지 올라간 뒤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 대가로 오후에 휴식 없이 4시간 반을 걸어야 했지만, 멋진 일탈이었다.
요 며칠 내 동반자는 홍콩에서 온 20대 청년 올리버.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기 전 프랑스에서 1년간 불어를 배우는 중이다. 호기심이 많고 성품도 다정하다. 엘브로네르(3462m)에서 곤돌라로 갈아타 에귀유뒤미디까지 가는 5㎞의 여정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곤돌라의 열린 창 너머 한 점이 되어 몽블랑을 오르는 이들이 보였다. 육체를 지닌 인간의 고통과 희열을 그들은 생생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수족냉증을 앓는 나는 저 눈길을 걷는 상상만으로도 발가락이 얼어붙는 것 같아 그저 감탄하며 바라볼 뿐. 젊은 날의 나였다면 저 산을 오르겠다며 가이드를 구했을 것 같다. 쉰을 넘긴 나는 점점 ‘정상’이나 ‘완주’ 이런 단어에 무심해지고 있다. 반드시 이뤄야겠다는 성취욕 같은 것은 사라지고, 큰 산을 오르던 이들에게 품었던 존경의 마음도 더불어 희미해졌다. 대신 멀고 높은 산만큼 가까이 있는 낮은 산도 사랑하게 되었다. 상기된 얼굴로 연신 감탄을 멈추지 않는 올리버를 향해 나는 ‘라떼족’이 되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30년 전에 에귀유뒤미디에 배낭여행 처음 왔을 때 말이야….”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