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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내의 신’이 응답했다…명반, 그리고 딱 하나의 불운 [ESC]

등록 2023-10-07 06:00수정 2023-10-07 16:52

나의 짠내수집일지ㅣ개인 수집가의 귀한 LP

당근마켓에서 120장에 50만원
희귀템 화수분…딱 하나 판이 튀네
당근마켓을 통해 구입한 산울림11집, 전람회 1집, 들국화 1집, 최성원 1집(왼쪽부터).
당근마켓을 통해 구입한 산울림11집, 전람회 1집, 들국화 1집, 최성원 1집(왼쪽부터).

엘피(LP) 수집으로 횡재하는 건 이젠 쉽지 않다. 중고 엘피 거래가 대중화하면서 인터넷만 검색하면 현재 거래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 안팎의 엘피 제조사가 레트로 열풍을 타고 1970~90년대 명반을 다시 찍어낸 ‘리이슈 엘피’도 교보문고 등에서 4만~6만원에 거래된다.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 중고 엘피 전문점이 많이 생겨나면서 귀한 엘피를 값싸게 구하는 건 더욱 힘들어졌다.

발을 넓혀 서울과 인접한 지역의 고물상과 중고판매점을 공략하지만 매한가지다. 승용차를 타고 지나칠 때마다 문이 굳게 닫힌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한 앤틱숍은 겉모습만 봐도 뭔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간판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혹시 엘피도 파느냐”고 물으니 주인장은 “골라 담는 건 안 된다. 내가 50장씩 묶어둔 것을 무조건 50만원에 가져가야 한다”고 답한다. “예전엔 뭘 모르고 골라가게 했더니 좋은 음반만 쏙쏙 빼갔다.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내가 그동안 귀한 엘피를 얼마나 헐값에 팔았는지 알게 됐다”며 “어떤 엘피가 섞여 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묶음을 가져갈 테면 오라”고 했다. 희귀 명반을 몇천원, 몇만원에 구하는 꿈을 꾸며 서울 동묘와 풍물시장 인근 노점을 주말마다 헤집지만 이젠 별 소득이 없다. 수집가는 많고, 안 팔고 버티면 원하는 값을 지불하는 이들이 언젠가 찾아온다는 걸 상인들도 잘 안다.

‘건축학개론’ 이후 찾아 헤매던

짠내 수집가가 발붙일 공간은 계속 좁아진다. 그래도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 끊임없이 안테나를 세우고 공을 들이면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하순 딱 그런 행운을 마주했다. 당근마켓을 검색하던 아내가 “대치동에서 어떤 사람이 엘피 120장을 65만원에 판다고 올렸는데, 이거 어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라고 물었다. 판매자는 ‘가격 네고(흥정) 불가’라면서 엘피 사진 몇장을 올렸다. 그 가운데 전람회 1집(대영에이브이·1994년)과 산울림 11집(서울음반·1987년)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전람회 1집은 2012년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 양서연(배수지)과 이승민(이제훈)이 시디플레이어로 ‘기억의 습작’을 함께 듣는 장면을 본 뒤부터 찾아 헤매던 음반이다. 김동률이 작사·작곡하고 고인이 된 신해철이 프로듀싱한 이 음반엔 많은 명곡이 담겨있다. 20여만원을 호가하며 찾기도 힘든 귀한 엘피였다. 산울림 11집은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안녕’ 등 명곡이 담겼는데 3형제(김창완·창훈·창익) 록 그룹인 산울림의 맏형 김창완이 낸 솔로 앨범 성격이 강하다. 음악 전문가들이 한국 100대 명반 1위로 꼽은 ‘들국화 1집’(서라벌레코오드사·1985년)까지 포함돼 있으니 50만원이면 무조건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음반 상태를 잘 모르지만 1장당 5천원 이하라면 모험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네고 불가라지만 혹시 50만원에 주신다면 즉시 가지러 가겠습니다”라고 판매자에게 문자를 남겼다. “지금 오시라”는 답이 왔다. 차를 몰고 찾아간 대치동 학원가 뒤 허름한 건물 지하 철물점, 상자 속엔 엘피가 빼곡히 담겨있었다.

무한궤도, 박선주, 이승철, 신승훈, 봄여름가울겨울, 문주란, 이동원, 공일오비 등 유명 아티스트의 엘피.
무한궤도, 박선주, 이승철, 신승훈, 봄여름가울겨울, 문주란, 이동원, 공일오비 등 유명 아티스트의 엘피.

얼핏 살폈다. 재킷이 없거나 별 가치 없는 경음악 엘피도 섞여 있지만 조용필, 봄여름가을겨울, 신해철, 문주란, 나훈아, 송창식, 주현미, 계은숙 등 유명 아티스트의 음반이 훨씬 많았다. “어렵게 모았을 텐데, 왜 파시느냐?”고 물었다. “젊었을 때 판이 나올 때마다 한 장씩 사서 듣던 것인데 아내가 집이 복잡하니 치우라고 한다. 요즘은 나훈아 등 트로트 몇 가지만 듣고 있어 그냥 정리하려는 것”이라고 답했다. “낱장으로 팔면 더 많은 돈을 받을 텐데요”라고 또 물었다. “그건 알지만, 한장 한장 사진 찍어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리는 것도 힘들고, 낱장 거래 때마다 왔다 갔다 하는 게 번거롭다. 그냥 한 번에 처분하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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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까지 온전한, 수집가의 정성

집에 와 상자 속 엘피를 모두 꺼낸 나는 ‘15년 짠내 수집의 정성에 감복한 행운의 신이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공일오비, 김건모, 김현식, 서태지와 아이들, 윤상, 이광조, 이선희, 이승철, 이승환, 이정석, 박남정, 변진섭, 조하문, 최진희 등 이젠 전설이 된 아티스트의 음반이 수두룩했다. 한장 한장 사 모으며 음반을 들었다는 판매자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증명하듯 재킷 속에는 엘피를 보호하는 속비닐은 물론 가사나 사진 등을 인쇄한 속지까지 온전했다.

월북시인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이고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가 함께 부른 노래 ‘향수’가 담긴 ‘그곳이 차마 꿈인들 잊힐 리야! 이동원’(아세아레코드·1989년) ‘안개 낀 장충단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등이 실린 ‘배호 힛트 집대성’(아세아레코드·1976년) 등 그동안 갖고 싶었지만 구할 수 없던 음반도 포함돼 있었다.

더욱이 노래는 익숙한데 그 노래를 만든 이가 누구인지 잘 몰랐던 아티스트의 솔로 음반도 수두룩했다. 록 밴드 들국화의 베이시스트인 최성원이 밴드 해체 뒤 마음을 정리하러 제주도에 가서 만든 명곡 ‘제주도의 푸른 밤’이 실린 첫 솔로 앨범 최성원 1집(서라벌레코드사·1988년), 요즘은 보컬 트레이너로 널리 알려진 박선주의 명곡인 ‘소중한 너’가 실린 박선주 1집(아세아레코드·1990년), ‘기차와 소나무’를 작사·작곡한 이규석의 데뷔 앨범(태광음반·1988년), ‘새들처럼’,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등 변진섭의 히트곡을 만든 지근식의 독자 음반 ‘혼자 남은 밤…지근식’(지구레코드·1989년) 등이 대표적이다. ‘공중전화 1집’(서울음반·1988년)도 횡재였다. 그 이름조차 생소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이승환의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등 수많은 명곡을 만든 천재 작사·작곡가이며 기타리스트인 오태호와 43살에 요절한 가수 홍성민이 1987년 결성한 밴드 공중전화의 희귀음반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좋을 수는 없는 법. 엘피 120장을 단박에 사들이는 중대 결심을 하게 한 ‘전람회 1집’을 턴테이블에 얹었는데…. 아뿔싸! 타이틀곡인 ‘기억의 습작’에서 판이 튄다. 돋보기로 살펴도 아무 흠집이 없는데 아무리 깨끗이 엘피를 닦아도 그 노래 앞부분이 일그러진다. 그 많은 엘피 가운데 딱 한장, 그중에 딱 한곡 ‘기억의 습작’이 문제였다. 그래도 난 행복하다. 또 얼마나 긴 시간을 기다려야 이런 초대박 행운이 찾아올까?

글·사진 신승근 기자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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