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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 갑판에서 컵라면을 먹는 밤

등록 2007-06-27 18:44

갑판에서 해질녘 빛의 변화를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녁 7시 40분 인천 앞바다 팔미도 부근을 지나고 있다.
갑판에서 해질녘 빛의 변화를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녁 7시 40분 인천 앞바다 팔미도 부근을 지나고 있다.
[매거진 Esc]
6300톤 오하마나호를 타고 인천-제주 13시간, 빛의 변화를 감상하다

‘오하마나호’는 “‘오!하마나’ 다 왔네”의 준말이라고 한다. 수도권에서 뱃고동을 울려 제주도까지 가는 배. 경상도 아줌마가 이렇게 빨리 제주도에 올 줄 몰랐다고 해서 ‘오하마나호’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표준어로는 ‘아니, 벌써호’ 정도 되지 않을까.


명성과는 다르게 6300톤의 몸집을 지닌 오하마나호는 그렇게 빠르지 않다. 인천에서 제주까지 시속 40㎞로 달려 13시간. 시속 800㎞로 1시간 만에 제주에 닿는 비행기의 20분의 1의 속도, 13배의 시간이다.

소박한 크루즈, 아니 벌써호!

저녁 7시. 오하마나호는 인천항을 후진해서 빠져나갔다. 승객의 대부분은 9만9천원짜리 2박3일 한라산 패키지로 온 등반객들이다. 배에서 자고 한라산에 올랐다가 다시 배에서 자고 인천에 돌아가는 ‘빡센’ 일정.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배가 출발하기 전부터 3등실에 둘러앉아 오징어를 씹으며 소주를 마셨다.

다른 사람들은 배 후미의 갑판에 올라 해질 녘 빛의 변화를 감상했다. 원래 출발할 때 인천의 하늘은 회색과 분홍색, 노란색이 섞여 있었다. 구름이 걷히자, 하늘은 청명한 파란색이 됐다가 이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인천시내는 아스라이 멀어져 분홍빛에 잠겼다가 이내 잿빛으로 바뀌어 사라졌다.

저녁 7시40분. 늙은 햇살을 맞은 바다는 활활 타올랐다. 주황색 파도가 고래 등처럼 떠올랐다. 파도는 입체적이고 바다는 몽환적이었다. 태양의 불씨는 배가 인천 앞바다의 끝인 팔미도에 가서야 꺼졌다. 팔미도 등대 아래 초록 수풀은 짙은 남색 옷으로 갈아입었고, 고물을 쫓아오던 갈매기의 노란 부리는 검게 변했다. 사람들은 배 안으로 총총 사라졌다.

커피숍의 가격은 소박하다.
커피숍의 가격은 소박하다.
레스토랑의 저녁 식사 시간은 7시부터 8시까지. 아주머니가 식판에 흰밥을 덜어주면, 반찬은 손님들이 알아서 덜어 먹는다. 오뎅국과 소시지, 녹두나물, 낙지볶음, 고등어 등. 학생식당과 비슷한 뷔페식당이다. 소박해서 좋다. 1인당 4천원.

오하마나호는 ‘크루즈 여객선’을 표방한다. 크루즈라면 있어야 할 것들, 즉 화려한 선실과 뷔페 식사, 쇼와 카지노와 면세점, 갑판의 선 베드가 나름대로 구비돼 있다. 선실은 로얄실과 1등실 그리고 2등실, 3등실로 나뉜다. 침대와 소파, 텔레비전, 안락한 조명, 바다로 난 창문까지 로얄실과 1등실은 크루즈 부럽지 않다. 2등실은 2층 침대가 놓여 있고, 3등실은 온돌방 구조다.

면세점 대신 한국적인 편의점

레스토랑에선 8시40분부터 라이브 쇼가 열린다. 루 크루스(24)가 노래를 부르고 톰 로마산타(49)가 전자기타를 친다. 마음씨 좋게 생긴 이 필리핀 듀엣은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를 부르다가, 비틀스의 ‘렛잇비’(Let it be)를 부르다가, 리처드 막스의 ‘라이트 히어 웨이팅’(Right here waiting)을 불렀다. 한 직원이 다가와 “노래 잘 부르죠?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이에요”라고 말하고 갔다. 선원과 승객들에게 인기가 좋은 크루스와 로마산타는 비자를 갱신하러 필리핀에 돌아갔다가 9월부터 공연을 재개할 것이라고 한다.

바다로 창문이 난 1등실은 크루즈 부럽지 않다.
바다로 창문이 난 1등실은 크루즈 부럽지 않다.
오하마나호에는 면세점 대신 ‘한국적 정서’에 맞는 편의점이 있다. 냉동만두를 데워주고,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준다. 한여름 밤, 갑판에서 앉아 먹는 컵라면 맛은 일품이다. 갑판에는 선 베드 대신 노랑, 빨강, 파랑색의 플라스틱 의자가 있다. 카지노 대신 구석에 모여 앉아 고스톱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오하마나호는 말하자면, 기백만원짜리 산악용 자전거(MTB)의 실속을 뽑아 만든 17만원짜리 ‘유사 엠티비’와 같다. ‘럭셔리 크루즈’에 있을 건 다 있는, 약간의 키치적 감성을 가진 ‘유사 크루즈’ 말이다.

선상의 아침은 안개가 깨웠다. 새벽 5시 다시 갑판에 올랐다. 안개는 수평선을 지웠다. 바다와 안개, 구름이 구분되지 않았다. 아직 원색을 찾지 못한 섬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갑판을 어슬렁거리고 있자니, 조타실에서 누군가 나와 손짓을 했다. 연평도가 고향이라는 박진환(45) 항해사. “지금 맹골 수도(水道)를 지나고 있어요. 이 지점이 다도해 감상의 포인트죠. 곧 해가 뜰 거예요.” 맹골수도는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의 뱃길이다. 서쪽은 망망대해고 동쪽은 다도해다. 하조도와 상조도를 넘으면 진도고, 진도를 넘으면 전라남도 해남이다. 배가 남행하는 동안 보통 해는 맹골수도와 추자도 사이에서 뜬다.

새벽 5시 30분, 거차도 앞을 휘감은 안개.
새벽 5시 30분, 거차도 앞을 휘감은 안개.

맹골수도와 추자도 사이에서 뜨는 해

거차도를 휘감은 안개 사이로 붉은 해가 드러났다. 어린 햇살이 바다에 생기를 불어넣자, 섬은 봉긋봉긋한 선을 그리며 나타났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다도 운해’가 펼쳐졌다. 병풍도를 지나갈 즈음 완전한 아침이 됐다. 바다는 원색을 되찾았다. 병풍도는 무인도라서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섬. 다도해의 서쪽 끝이자, 제주해협의 시작이다. 유람선이라도 된 듯 배가 병풍도의 절벽 밑을 지나치니, 섬의 수직절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어 배는 추자도와 관탈도를 비켜 지나갔다.

7시30분, 오하마나호 앞에 거대한 육지가 보였다. 여태 본 섬 중에 가장 큰 섬. 한라산이 흘러내린 제주도다. 사람들이 짐을 챙기고 로비에 나왔다. 오전 8시. 제주항 앞바다는 청록색을 띠었고, 항구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는 햇빛에 반사돼 은빛으로 빛났다.

6300톤의 몸집을 지닌 오하마나호. 시속40km로 달린다.
6300톤의 몸집을 지닌 오하마나호. 시속40km로 달린다.

오하마나호와 제주 여행 쪽지

월 수 금 저녁 7시에 출발

■ 오하마나호의 최대 매력은 해질녘과 해뜰녘 빛의 변화를 감상하는 것이다. 배는 서해 먼바다로 나가지 않고 내해를 관통한다. 배의 주변에는 언제나 섬이 솟아 있고, 붉은 태양빛이 푸른 바다, 초록 섬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배는 인천 연안부두 연안여객 터미널에서 월·수·금요일 저녁 7시에 출발해 이튿날 아침 8시에 제주항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한다. 제주에서는 화·목·토요일 저녁 7시에 출발해 이튿날 아침 8시에 인천에 도착한다. 13시간 걸림.

선실은 로열·1·2·3등실, 1·2등 가족실이 있다. 1등실은 2인1실 19만원(이하 편도), 2등실은 1인 7만원, 3등실은 53,500원. 1등실을 추천한다. 침대와 냉장고, 텔레비전, 욕실 들이 딸려 있다. 김포~제주 왕복 항공권(2인)이 16만원 안팎임을 고려할 때 4만원만 더 주면 되는 셈이다. 7월 말, 8월 초의 1등실은 많지 않으니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 여름철 특별 수송기간(7월20일~8월15일)에는 5천~2만원쯤 비싸다. 뱃멀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배가 크기 때문에 요동이 크지 않다. 홈페이지 http://cmcline.co.kr 예약 문의 (032) 889-7800.

■ 제주도를 갔을 땐, 내국인 면세점에 들러 물건을 사는 게 알뜰한 쇼핑법이다. 의류와 화장품, 양주, 담배 등 160개 상표의 1만여 종 상품을 시중가의 50~80%대에서 살 수 있다.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운영하는 내국인 면세점은 제주항 여객선터미널(제2·6부두)과 제주공항에 있다. 출발 때만 이용할 수 있고, 연간 4회·회당 40만원까지 살 수 있다. 주류는 한 번에 12만원 이하 1병, 담배는 10갑 이하로 제한된다.

오하마나호=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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