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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되고파 안달난 남자

등록 2007-09-12 17:34수정 2007-09-13 18:09

<즐거운 인생> 김상호씨
<즐거운 인생> 김상호씨
[매거진 Esc] 도대체 누구야?
<즐거운 인생>에서 첫 주연 꿰찬 김상호씨,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역할 꿈꾼다
대학로 출신으로 충무로의 허리를 받치고 있는 배우군을 둘로 나누면 이렇게 분류할 수도 있다. 튀는 순발력이나 뚜렷한 개성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는 배우와 오래전부터 화면 안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고 친숙한 배우들. 김상호(37)는 후자에 속한다. 그가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화폐위조 기술자를 연기했던 2004년작 <범죄의 재구성>. 산적 같은 생김새와 벗겨진 머리가 강한 인상을 줄 법도 한데 그는 날마다 보는 슈퍼 아저씨처럼 친한 얼굴로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3년 뒤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12일 개봉)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꿰찼지만 그는 여전히 농담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옆집 아저씨처럼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원주에서의 막노동, 그 애달픈 기억

“뿌듯했죠.” “첫 주연을 맡아서?” “아뇨, 혁수(극중 인물)가 돈을 제일 잘 벌잖아요.” 웃으라고 하는 말이지만 그럴 법도 하다. 지금까지 그가 맡아온 역은 화폐위조범부터 룸살롱 영업상무(<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전국을 떠도는 타짜(<타짜>) 등 중산층 생활인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배우 김상호는 확실히 견실한 생활인이다. 고민하다가 아내 권유로 <식객> 출연을 결정했다거나 아들과 같이 놀기 위해 요새 수영을 배우고 있다거나,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초승달로 변하고 입이 양옆으로 벌어진다.

화폐위조 기술자를 연기해 주목받기 시작한 영화 <범죄의 재구성>
화폐위조 기술자를 연기해 주목받기 시작한 영화 <범죄의 재구성>
“술 협찬이 들어와서.” <즐거운 인생> 촬영하면서 어떤 게 가장 즐거웠냐고 묻자 “우리가 원래 술을 안 마시는 사람들인데 술 협찬이 들어와서 할 수 없이 자주 마셨다”고 농담 반 진담 반의 대답을 하는 그에게 이 영화는 특별해 보인다. 그도 한때는 배우의 꿈을 접고 돈을 벌기 위해 생활인으로만 살았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98년쯤인가, 다시는 서울 쪽으로 오줌도 안 눈다고 결심하고 아내 고향인 원주로 떠났어요. 5년 동안 정말 열심히 연극을 했는데 월세 보증금까지 홀랑 다 까먹은 거예요. 경주에서 연극하겠다고 상경할 때 형들이 돈 없고 빽 없는 니가 할 수 있겠냐고 해서 ‘내가 돈 만들고 빽 만들어서 돌아오겠다’는 명언을 남기고 왔는데,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죠.”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잡을 줄 알았는데 잡기는커녕 ‘그래, 가서 돈 잘 벌어라’는 연극판 동료들의 격려만 듣고서 찾아간 원주에서 그는 라면가게와 우유배달, 신문배달, 막노동 등을 닥치는 대로 했다. 그렇게 현금 500만원이 모였을 때 그의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나중에 내 자식이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했을 때 내가 인생 선배로서 꾸짖을 수 있을까, 쪽팔리더라고요. 삼류배우로 살더라도 떳떳하게 살자고 아내를 설득했어요. 아내의 배달차인 아토스 뒷자리에 채운 짐이 다였죠. 크리스마스 이브였어요.” 대학로에 돌아온 뒤 연출하는 대선배로부터 “눈빛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포스터 붙이기의 달인’에서 진짜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극배우 김상호의 존재를 알린 작품이 <인류 최초의 키스>였다.

“이제 고생 끝났어. 일 그만두고 편안히 쉬세요.” 연극을 본 <범죄의 재구성> 연출부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이 영화를 찍은 다음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첫 출연작에서 비중 있는 역을 맡아 포스터(티저)에 등장한데다 영화가 대박을 쳤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이제 인생 폈다 싶었죠. 정말 가난이 지긋지긋했으니까. 음, 근데 6개월 동안 연락이 없데요. 만삭의 아내가 다시 국회도서관에 아르바이트를 나가기 시작했죠.”(웃음) 6개월의 살 떨리는 시간이 있었지만 이후 만난 감독들이 임상수(<그때 그사람들> <오래된 정원>), 박진표(<너는 내 운명>), 이준익으로 이어졌으니 김상호는 실력만큼이나 운도 좋은 배우다.


첫 주연작 <즐거운 인생>
첫 주연작 <즐거운 인생>

말투와 얼굴에 배인 기분좋은 낙천성

“악마성과 순수성을 동시에 가진 배우라고 써주세요.” 다음 작품은 뭔가 물었더니 “시나리오가 안 들어온다”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답을 한다. “요새 충무로가 침체는 침체인가 봐요.” 맞장구를 쳤더니 “그런 줄 알고 주변에 전화해 보면 그 사람들은 다 찍고 있어”라며 캐스팅을 위해 악마성, 순수성 운운하는 말을 한다. 이쯤 되면 짓궂은 농담으로 넘어갈밖에. 설사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듣는 사람을 웃지 않고 못 배기게 만드는 그의 말투와 얼굴에는 기분 좋은 낙천성이 배어 있다. “사실은 제가 엄청 소심해요. 올여름에 우리 육남매가 같이 여행을 갔다가 형들이 나한테 노래를 시키는데 결국 못 했잖아요. 술이 덜 취해서. 그래도 느긋하고 낙천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요. 소심한 사람이 안달까지 하면 옹졸해지잖아요.”

인터뷰 내내 폭소가 끊이지 않았던 김상호의 유머감각은 발군이다. 그에 비하면 그가 했던 역들은 오히려 충무로 영화에 흔한 코믹한 감초와는 거리가 멀었다. 앞으로 한번 해보고 싶은 역도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놈”이라는데, 과연 그 ‘귀여운 산적’ 같은 얼굴에 미운털이 제대로 박힐 수 있을지 궁금하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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