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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에 비하면 일본은 답답한 나라

등록 2007-10-11 16:34수정 2007-10-11 16:48

리처드 파월의 아시안 잉글리시①
리처드 파월의 아시안 잉글리시①
[매거진 Esc] 리처드 파월의 아시안 잉글리시①
히말라야에 파묻힌 작은 산골 마을의 소년들은 왜 그리 유창할까
정통 영국 영어가 진짜 영어일까요? 세련된 미국 영어를 배워야 성공할 수 있을까요? 100곳의 지역에는 100개의 영어가 있습니다. 리처드 파월(Richard Powell) 일본대학 교수는 일본어·중국어·타이어 등 아시아 언어에 능통한 영국 출신 언어학자이자 법학자입니다. 리처드 파월이 아시아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경험한 영어의 세계에 초대합니다.

요즈음 영어는 아시아 어느 곳에나 있다. 아시아인들이 영어와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면, 아시아의 다양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매우 복잡하고 변화 중인 일종의 ‘관계’라 할 수 있다. 때로는 영어 지식이 부와 교육, 혹은 정치적 성향을 가늠하는 신뢰 못할 척도가 되기도 하니까.

드종카도 쓰고, 영어도 쓰고 …

말레이시아 친구가 도쿄에 사는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제법 유명한 예술가였는데, 도쿄의 갤러리와 박물관을 보고 싶어 했다. 나는 근처 역까지 친구를 데려다 줬다.

아파트를 나가는 길. ‘Asahi Soft Drinks’라고 영어로 써진 자판기가 ‘Boss Coffee’와 ‘Royal Milk Tea’를 팔고 있었다. 자판기 옆에는 ‘Service for clean life’를 제공한다는 세탁소가 있었다. 그 옆에는 ‘Children’s Garden’이라는 유치원과 ‘Watanabe Medical Clinic’, ‘Cotswolds’, ‘Original Roast Beans’ 그리고 ‘Babys Design’이라는 가게들이 차례로 이어졌다. 편의점은 ‘Convenience’라는 글자를 써놓았고, 우체국은 ‘Post Office’라는 간판을 달았다. 거리 위에 서 있는 간판은 내가 ‘Shopping Street’를 거닐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역 안으로 들어갔다. ‘New Arrival’ 재킷, ‘New Release’ 시디, 재고 ‘Sale’ 등의 문구가 우릴 맞아줬다. 신문 가판대에서는 〈Diving World〉와 〈Marine Photo〉 그리고 〈Boat Boy〉 등의 잡지가 팔리고 있었다. 친구가 말했다. “음, 아무래도 영어를 쓸 줄 알아야 도쿄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

도쿄 시내는 영어천국이다. 그렇다고 도쿄 시민들이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니다.
도쿄 시내는 영어천국이다. 그렇다고 도쿄 시민들이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니다.
내 친구는 말레이시아 테렝가누 출신이다. 만다린어(북방 중국어)로 교육을 받았고, 평소엔 광둥어와 광둥어의 방언인 하카, 호키엔을 쓴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어와 이와는 판이하게 다른 말레이시아의 방언, 인도네시아 방언도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는 영어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예술과 정치, 종교에 대해 영어로 대화하곤 한다. 그의 입에서 영어 문장은 끊어지지 않고 술술 이어진다. 때로는 알파벳 그대로 발음하거나 중국어 순서대로 말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른 말레이시아어를 구사할 때처럼 이 언어 저 언어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심지어 한 문장에 여러 언어가 섞이는 수도 있다!

그 친구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왕국으로 알려진 부탄을 여행한 적이 있다. 부탄의 작은 수도 팀푸에 도착하면, 누구라도 이곳이 고대 히말라야 왕국이라고 느낄 것이다. 도처에 절과 승려가 있고, 사람들은 부탄 고유의 의상을 입고 다닌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이 있다. 팀푸의 거리에서 누군가에게 영어로 말을 걸면, 완벽한 영어를 들을 수 있다는 것! 히말라야에 파묻힌 작은 산골 마을에서도, 청소년과 이야기할 때도 말이다.

40년 전 부탄은 영어에 기반을 둔 교육 시스템을 선택했다. 영어를 경제적 근대화의 도구로 인식한 것이다. 지금은 80% 이상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상교육을 받는다. 물론 집에서 아이들은 부탄 말인 ‘드종카’로 말하지만, 적어도 학교에서는 영어로 말한다. 이런 ‘영어 상용화’ 정책은 꽤 성공적이어서, 오히려 요즈음 정부는 드종카 교육을 지원하고 사멸하는 어휘를 복구하는 ‘드종카 현대화’ 작업을 벌이고 있을 정도다.

도쿄시내 다녀온 말레이시아 친구의 한탄

그날 도쿄 시내를 다녀온 친구를 역에서 다시 만났다. 그가 말했다. “좋았어. 그런데 아무도 영어를 못하는 거 있지? 아시아의 최고 ‘부자 나라’인데 말이야. 일본 사람들은 부탄 사람들보다 영어를 못한다니까! 심지어 나보다 못해!”

그러면서 친구는 그날 산 물건들을 보여줬다. 물건에는 하나같이 영어가 쓰여 있다. 대부분 ‘장식용’이다. 친구가 사 온 〈Diving World〉라는 잡지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어와 사진들 사이 틈틈이 영어가 끼어 있었다. 하지만 영어 단어들은 한데 모여 완전해지지 못했다.

때로는 영어는 가장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영어로 ‘보여지는’ 것들이 전혀 영어가 아닌 곳도 있다.

번역 남종영 기자

‘아시안 잉글리시’와 ‘최범석의 시선’, ‘허시명의 알코올트래블’은 모두 격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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