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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품들의 속닥거림

등록 2007-10-18 18:22

용서받지 못한 자
용서받지 못한 자
[매거진 Esc]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용서받지 못한 자>(2005)

기억은 편의에 복종한다. 용량이 한정된 우리의 뇌는 회상하기 싫은 시절의 기억부터 서둘러 비워낸다. 더불어 그 시절을 함께한 사람들의 얼굴도 빠르게 지워진다. 제대 후 구직 중인 <용서받지 못한 자>의 태정(하정우)은, 군대 후배이자 중학교 동창인 승영(서장원)의 갑작스런 연락에 허둥댄다. 말로는 반기지만 표정은 자못 당혹스럽다. 군 생활의 관습을 혐오했던 신병 승영은 신념 있는 ‘고문관’이었다. 그런 승영을 병장인 태정은 힘 닿는 대로 보호했지만 “싸고돈다”는 구설수가 두려워 결국 부대원들 보는 앞에서 승영을 구타해야 했다. (달리 말해 군대는 친구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을, 하급자에게 골고루 행하도록 권유받는 곳이다.) 제대한 태정이 꺼리는 방문객은, 승영이 아니라 그가 데리고 나타날 과거의 군복 입은 자신이다.

대대장의 군화가 다른 대대장의 그것보다 광택이 밋밋하면 왜 하늘 무너지는 사건인가? 선임병은 왜 제 손으로 슬리퍼를 가져다 신을 줄 모르는가? 착한 사람보다 말 잘 듣는 사람이 왜 더 우수한 인간인가? 승영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조직에 적응 못하는 청년들은 흔히 자문한다. “내게 문제가 있는 걸까? 나를 괴롭히는 저 인간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승영은 나나 그가 아닌 제도가 잘못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군 생활의 목표를 세운다. “고참 되면 난 저들과 다르게 행동하겠어.” 어설픈 신병 지훈(윤종빈)이 들어오자 승영은 벼른 대로 실천한다. 모두 잠든 밤, 승영은 지훈을 화장실로 불러내 그가 먹고 싶다던 라면 봉지에 물을 부어 건넨다. 그리고 묻는다. “다른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나한텐 다 이야기해도 돼.” 순간, 인기척이 들린다. 숨죽인 승영의 귀에 화장실 밖에서 병장 태정이 상병 대석을 때리고 추궁하는 소리가 들린다. “밑의 새끼들 X같이 굴면 너부터 죽는다고 내가 얘기했어, 안 했어? 내가, 방법까지 알려줘야 해?” 짐작은 했으리라. 그러나 그를 묵인하고 보호해 온 태정의 울타리가 어떤 방식으로 지탱되는지 승영은 그날 밤 비로소 목도한다. 병장이 ‘알려주지 않은 방법’을 고안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상병 대석은 ‘관리자’로 변모하고 조직의 필요를 곧 자신의 필요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지키려면, 그 가치의 반대말로 이뤄진 세계의 유능한 부품이 되어야 한다는 역설은, 태정의 제대 후 홀로 남겨진 승영의 뼈에 점점 더 사무친다. 군복 입은 폼이 그럴듯해진 여름, 승영은 상급자에게 뇌물로 아부하고 어리숙한 후배를 비아냥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무리한 변절은 참혹한 부작용을 낳는다. 나쁜 조직은, 개인이 윤리적 주체성을 포기하게 만들지만, 그 결과 발생하는 불행에 대한 죄책은 개인에게 떠넘긴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끝내 참을 수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라던 시인 랭보의 탄식에, 승영은 아마 동조했을 것이다.

김혜리 <씨네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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