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라. 김영갑(아래 사진)의 사진에는 바람의 흔적이 남아있다. 바람에 휘어 자란 나무, 엎드린 억새, 움직이는 구름과 파도 모두 제주의 바람이 만든 것들이다.
[매거진 Esc]한국의 사진가들
파노라마 카메라로 20년 넘게 제주만 찍다
갤러리를 남기고 떠난 고 김영갑 사진가 김영갑은 시인 기형도와 닮았다. 그의 예술이 절정에 이를 무렵 갑자기 그는 세상 저편으로 사라졌다. 외롭고 쓸쓸하고 가난했다. 진정한 예술은 예술가의 죽음 뒤에 비로소 평가받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다시 한 번 체현케 해 주었다. 흔한 것들의 아름다움이여 김영갑은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살다가 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렸고, 85년 아예 제주에 정착해 내내 제주 사진을 찍었다. 언젠가부터 셔터를 눌러야 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온몸이 마비됐다. 2005년 5월29일 김영갑은 세상을 떴다. 루게릭병이었다. 향년 48. 김영갑은 20년 이상 제주만 담았다. 하이라이트는 파노라마 카메라인 ‘후지617’로 찍은 90년대 중반 이후의 작품들이다.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면, 바람이 지나간다.
“(김영갑이) 풍경을 찍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바람을 그저 마음에 담으려 했다.”(<김영갑 1957~2005> 서문) 사진비평가 진동선씨의 이런 추측은 왜 김영갑의 사진에 스펙터클한 제주의 풍경이 아니라 소담한 자연주의적 풍경이 자리잡았는지 설명해준다. 바람이 스쳐간 풍경은 김영갑이 생전에 말했던 ‘삽시간의 황홀’이다. 바람이 만든 흔적이자, 바람이 할퀴고 간 여백이다. 그 순간은 김영갑의 말처럼 “한 번 실수하면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 “일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승부를 거는 처절한 싸움으로 건지는 것”이다. 제주를 바람처럼 스쳐간 사람은 바람의 찰나를 느낄 수 없다. 그가 바람에 탐닉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아마 그가 정신적 고향으로 여겼던 표선면 대천동의 오름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87년, 당시 고등학생이던 박훈일(38)씨의 대천동 집 방 한 칸을 얻어 살았다. “삼촌은 매일 중산간 들녘에 나가서 풍경을 담았어요. 그러곤 들어와서 방 한 칸에 커튼을 치고 인화와 현상 작업을 하셨지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에게는 오름과 들녘은 일상의 경관이었지만, 이런 일상을 느림과 찰나의 아름다움으로 전화시킨 이는 여태껏 없었다. 박씨도 김영갑을 ‘삼촌’이라고 부르며 흔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박씨도 사진가가 됐고,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의 관장으로 일한다.
세상에 남겨둔 무엇, 갤러리
김영갑의 정신은 두모악에 남았다. 그는 루게릭병 판정을 받은 직후, 2002년 성산읍 삼달리의 폐교를 임대해 박씨와 함께 갤러리를 꾸몄다. 갤러리는 세상에 남겨 두고 갈 무엇이었다. 그가 루게릭병을 판정받기 전 2001년 4월에 낸 사진집 <마음을 열어주는 은은한 황홀>(하날오름 펴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마치 죽음을 예감한 듯 그의 삶과 사진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나에게도 비극과 고통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는 것입니다. 이 때 들판은 저에게 가르쳐줍니다. 어떻게 하면 시련을 성장의 또다른 기회로 만들 수 있는지를. 그래서 들판의 친구로 삽니다. 들판을 친구 삼아 나의 비극과 고통을 넘어섭니다. 아픔은 한 동안 머물다 떠납니다. 행복과 즐거움보다는 불행과 슬픔이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듭니다.”
제주=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김영갑을 만나는 곳 김영갑갤러리 두모악(dumoak.co.kr·064-784-9907)에 사진이 전시돼 있다. 그가 손수 구상하고 만든 중산간 정원은 그의 사진과 닮았다. 그의 사진은 <김영갑 1957~2005>(다빈치 펴냄)에 망라돼 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앤북스 펴냄)는 김영갑의 글과 사진이 담겼다. 제주도로 철학한 자연주의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1995년 눈빛 출판사에서 나온 흑백 사진집 <마라도>는, 중산간 사진으로만 각인된 그의 다른 면모를 볼 만 하다. 아쉽게도 절판돼 발품을 팔아 헌책방에서 구해야 한다.
갤러리를 남기고 떠난 고 김영갑 사진가 김영갑은 시인 기형도와 닮았다. 그의 예술이 절정에 이를 무렵 갑자기 그는 세상 저편으로 사라졌다. 외롭고 쓸쓸하고 가난했다. 진정한 예술은 예술가의 죽음 뒤에 비로소 평가받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다시 한 번 체현케 해 주었다. 흔한 것들의 아름다움이여 김영갑은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살다가 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렸고, 85년 아예 제주에 정착해 내내 제주 사진을 찍었다. 언젠가부터 셔터를 눌러야 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온몸이 마비됐다. 2005년 5월29일 김영갑은 세상을 떴다. 루게릭병이었다. 향년 48. 김영갑은 20년 이상 제주만 담았다. 하이라이트는 파노라마 카메라인 ‘후지617’로 찍은 90년대 중반 이후의 작품들이다.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면, 바람이 지나간다.
“(김영갑이) 풍경을 찍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바람을 그저 마음에 담으려 했다.”(<김영갑 1957~2005> 서문) 사진비평가 진동선씨의 이런 추측은 왜 김영갑의 사진에 스펙터클한 제주의 풍경이 아니라 소담한 자연주의적 풍경이 자리잡았는지 설명해준다. 바람이 스쳐간 풍경은 김영갑이 생전에 말했던 ‘삽시간의 황홀’이다. 바람이 만든 흔적이자, 바람이 할퀴고 간 여백이다. 그 순간은 김영갑의 말처럼 “한 번 실수하면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 “일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승부를 거는 처절한 싸움으로 건지는 것”이다. 제주를 바람처럼 스쳐간 사람은 바람의 찰나를 느낄 수 없다. 그가 바람에 탐닉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아마 그가 정신적 고향으로 여겼던 표선면 대천동의 오름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87년, 당시 고등학생이던 박훈일(38)씨의 대천동 집 방 한 칸을 얻어 살았다. “삼촌은 매일 중산간 들녘에 나가서 풍경을 담았어요. 그러곤 들어와서 방 한 칸에 커튼을 치고 인화와 현상 작업을 하셨지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에게는 오름과 들녘은 일상의 경관이었지만, 이런 일상을 느림과 찰나의 아름다움으로 전화시킨 이는 여태껏 없었다. 박씨도 김영갑을 ‘삼촌’이라고 부르며 흔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박씨도 사진가가 됐고,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의 관장으로 일한다.

사진작가 김영갑
김영갑을 만나는 곳 김영갑갤러리 두모악(dumoak.co.kr·064-784-9907)에 사진이 전시돼 있다. 그가 손수 구상하고 만든 중산간 정원은 그의 사진과 닮았다. 그의 사진은 <김영갑 1957~2005>(다빈치 펴냄)에 망라돼 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앤북스 펴냄)는 김영갑의 글과 사진이 담겼다. 제주도로 철학한 자연주의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1995년 눈빛 출판사에서 나온 흑백 사진집 <마라도>는, 중산간 사진으로만 각인된 그의 다른 면모를 볼 만 하다. 아쉽게도 절판돼 발품을 팔아 헌책방에서 구해야 한다.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