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부터 만둣국, 제육, 냉면
[매거진 Esc] 예종석의 맛있는 집/ 평양면옥
냉면의 계절이다. 요즘 사람들은 냉면을 여름철 음식으로 알지만 냉면의 본고장인 이북출신 어르신들은 냉면을 겨울음식으로 친다. 추운 겨울밤에 살얼음이 둥둥 뜨는 차가운 동치밋국에 메밀국수를 말아 벌벌 떨면서 밤참으로 먹던 맛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다. 추운 겨울날에 먹는 냉면은 차가운 음식으로 추위를 이겨내는 이랭치랭의 피한 지혜다. <동국세시기>에도 냉면은 겨울시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에 출간된 <시의전서>나 <규곤요람>, <부인필지> 등 여러 요리책에 냉면 만드는 법이 소개되어 있지만 육수나 고명의 종류 등에서 지금의 냉면과는 상당한 격차가 있다. 특히 국물로는 동치밋국을 흔히 써 오늘날의 고기육수와는 거리가 있다. 아무래도 냉면이라는 것이 가정에서 해먹던 음식이라 딱히 정해진 원형이 없는데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조리법이 경제여건의 변화에 적응한 탓도 있으리라.
흔히들 냉면을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으로 구분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흔하게 먹는 것이 평양냉면이다. 평양냉면은 감자나 고구마 전분으로 만드는 함흥냉면과는 달리 메밀이 면의 주성분이라 툭툭 끊어지는 면발과 구수한 메밀향이 일품이다. 그러나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평양냉면만큼 만들기 힘들고 미묘한 음식도 없는 것 같다. 20~30대 젊은 사람들에게 평양냉면을 대접하면 이렇게 밍밍한 음식을 무슨 맛으로 먹느냐는 불평이 돌아오기 일쑤다. 요즘의 자극적인 음식 맛에 길들여진 입에는 메밀함량 높은 평양냉면의 무덤덤한 한 맛이 도무지 와 닿지를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중의 냉면은 대부분 냉면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메밀함량도 적고 육수도 새콤달콤하다. 이렇듯 그 맛이 시류에 따라 변절을 하다 보니 가장 흔하게 접하는 음식이지만 정작 마음에 차는 냉면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최근 북한에 두어 차례 가서 두루 먹어본 유명냉면들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서울에 몇몇 냉면 명가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자주 찾는 집이 평양면옥이다. 평양면옥은 평양의 대동문 앞에서 시아버지와 함께 대동면옥을 경영했던 변정숙 할머니(80)가 6·25 때 월남하여 창업한 전통의 냉면집이다. 지금은 그 자제들이 3대째 장충동 경동교회 앞의 본점(2267-7784)과 논현동(549-5378) 및 분당(031-701-7752)에 분점을 경영하고 있다. 식당 내에 제분기를 설치하여 그날 쓸 메밀가루를 직접 빻아 사용한다. 메밀함량이 90%나 되기에 평양면옥의 면에서는 메밀의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양지와 사태로 끓인 맑고 담백한 육수는 메밀 면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냉면(8천원)과 잘 어울리는 제육(2만원)은 물론 큼직한 이북식만둣국(9천원)과 어복쟁반(6만6천원)도 일품이다. 변할머니의 꿈처럼 평양면옥이 평양에 분점을 내면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룰 것 같다.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예종석의 맛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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