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여행은 정치적 행위… 지문 채취 등의 굴욕을 당당히 거부하는 사람들
사실 여행은 정치적이다. 여행의 절차, 이를테면 여행지 선택, 비자 발급, 출입국, 주민들과의 관계 등에서 일어나는 행위는 자의든 타의든 정치적 성격을 띤다. 여행할 때 대자본이 아닌 소규모 지역자본을 이용하자는 운동, 인권탄압 국가인 버마를 여행하지 말자는 운동 등이 전세계 책임여행 단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유다.
그렇다면 ‘악의 축’ 국가를 괴롭히는 ‘21세기 로마제국’으로 비판받는 미국 방문은 어떨까. 미국 비자 발급받기가 ‘더러워서’ 미국을 가지 않겠다는 사람을 ‘양심적 미국 비자 거부자’라고 불러도 될까. 이들은 미국 정부가 통장 잔액은 물론 출신 초·중·고교 등 지나치게 많은 개인정보를 요구한다고 비판한다. 미국 공항에서 찍는 열 손가락 지문도 자신의 인권을 훼손한다고 생각한다.
길아무개(32·회사원)씨는 여가 목적으로 미국을 가지 않는다. 업무 목적으로도 가 본 적이 없다. 길씨는 “비자 발급 과정이나 입국 과정에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당하는 등 굴욕감을 느끼면서 미국 여행을 하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 활동가는 실제로 올해 초 예정된 일본 여행을 포기했다. 일본 또한 지난해부터 입국 심사장에서 지문 채취와 사진 촬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입국자 정보를 범죄자 데이터베이스에 대조하려는 것이다. 오 사무처장은 “지난 2월 일본 시민단체에서 강연 요청을 했지만, 고심 끝에 가지 않았다”며 “국가 정책적으로 각종 입국심사가 필요하긴 하지만, 과도하다면 여행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의 활동가 조백기씨도 같은 이유로 지난해 일본행을 포기했다. 조씨는 “입국에 앞서 지문을 찍는 걸 상상만 해도 불쾌하다”고 말했다.
이들이 특히 우려하는 것은 8월부터 전면 발급되는 전자여권이다. 여권에 부착된 전자장치에 개인정보가 통합 저장되고, 2010년부터는 지문 등 생체정보가 전자여권에 담길 예정이어서 정보인권단체를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조만간 시행될 미국 비자 면제 프로그램도 전자여권과 정부간 여행자 정보 공유 등이 전제된 사실상의 전자여행 허가제로 ‘무늬만 비자면제’라고 이들은 비판한다. 최근 인권단체연석회의 활동가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1호로 발급받은 전자여권을 반대하면서 일반여권을 재발급받는 집단행동을 벌였다.
자연스레 느끼는 저어함을 억누르며 입국 자격을 구걸할 필요는 없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여행은 생계 수단이 아니라 여가 수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비자를 받는 게 ‘비양심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들의 행동이 주목되는 건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여행 철학과 기준을 세우기 때문이 아닐까.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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