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를 갖고 튀어라
[매거진 esc]
특급호텔 즐기고 ‘먹튀’하는 스키퍼
뛰는 안전 시스템 위 나는 그들을 잡아라 “대우전자 부사장 ㅅ아무개입니다.” 120수의 명품 정장 웃옷에 작은 대우전자 배지가 반짝였다. 아직 대우사태가 벌어지기 전인 1997년 봄, 그룹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프런트의 체크인 담당은 인수인계 파일을 곁눈질했다. ‘대우전자 부사장-익스프레스 체크인으로 처리할 것.’ 보통 예약 손님이 오면 외국인은 여권과 신용카드를 프런트에 맡기고 한국인은 명함이나 주민등록증과 신용카드를 맡겼다. 그러나 초특급 브이아이피들은 이런 절차를 뛰어넘는 익스프레스 체크인 혜택을 받았다. ㅅ부사장은 저녁 봄바람이 쌀쌀하다는 듯 옷깃을 여몄다. 최고급 양주 8병을 한꺼번에 주문 체크인 두 시간 뒤부터 룸서비스 전화에 불이 났다. ㅅ부사장이 최고급 양주 8병을 한꺼번에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특급호텔의 프리미엄 양주는 ‘액체로 된 금’이다. 시중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고급이 많다. “ㅅ그룹의 인수합병 문제로 부산에 있는 ㅅ그룹 대표이사를 만나는데 선물로 줄 술”이라는 부사장의 목소리는 근엄했다. 그러나 최고급 양주를 오밤중에 룸서비스로 올려보낼 처지가 된 식음 담당 지배인은 진땀을 흘렸다. 머릿속에서 ‘혹시…’ 하는 생각과 ‘브이아이피 고객의 주문’이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급한 대로 야간에 손님 접대를 총괄하는 당직 지배인의 서명을 받아 올려보냈다. 식음 담당 지배인은 다음날 아침 총지배인에게 불려갔을 때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사표 쓰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는 잠에서 깼다. 자칭 ‘부사장님’은 새벽에 양주를 쇼핑백에 우겨넣고 사라졌다. 물론 1400만원에 달하는 술값과 객실 이용료는 내지 않았다. “사표 내!” 복도까지 새나갈 만큼 데시벨 높은 총지배인의 목소리가 처음 전화로 예약을 받은 직원, 체크인 담당 직원, 식음 담당 지배인 등 세 직원의 심장을 찔렀다. 총지배인실을 나오고 나서 작전이 시작됐다. 식음 담당 지배인은 한 달 동안 업무가 끝난 뒤 경비실에 틀어박혀 폐쇄회로 카메라 녹화테이프를 보고 또 돌려 봤다. 한 달쯤 뒤 그는 당시 체크인 담당에게 조용히 전화를 걸었다. “잡으러 가자.” 당시 이 호텔에는 관할 경찰서의 외사계 형사 1명이 구석방을 빌려 수시로 출입하고 있었다. 테러국가로 지목된 나라의 투숙객 현황을 파악한다는 명분이었다. 평소 호텔 직원들 사이에서 불청객 대접을 받던 형사의 아침저녁 인사를 따뜻하게 받아줬던 건 오로지 식음 담당 지배인뿐이었다. 그게 도움이 될 줄 그도 몰랐다. 외사계 형사는 식음 담당 지배인이 찾아낸 번호판 사진을 근거로 수사에 나섰다. 차적 조회로 주소와 인적사항을 알아냈다. 프런트 직원은 대낮에 파자마 차림으로 붙들려 온 ‘부사장’이 경찰 조서 작성 때 밝힌 직업을 듣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아현동에 있는 중소 인쇄업체의 사장이던 그는 교회 장로이기도 했다. 식음 담당은 “부도난 회사를 살려보려 했다”는 사기꾼의 울먹임에 마음속으로 여러 번 연습했던 욕을 결국 던지지 못했다. 그러나 사기꾼의 반납 요청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미 매출 처리가 된 뒤였기 때문이었다. 대학교수인 사기꾼의 동서가 4교시를 마치자마자 경찰서로 뛰어와 신용카드 3개로 1400만원을 결제했다. 합의로 풀려난 ‘부사장’은 두 번 다시 스키퍼(skipper·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고객을 가리키는 호텔업계 용어) 노릇을 하지 않았을까? 최근 방한한 소피 마르소처럼 유명인을 보는 것은 특급호텔 직원들의 작은 기쁨이다. 늘 상류사회를 만나는 이들에게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은 첫째 의무다. 손님을 대하는 말의 어미, 시선 처리 하나하나가 프로페셔널리즘의 결과다. 손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 감정노동의 틈새를 노리는 존재가 있다. 스키퍼다. 시스템이 정교해진 지금은 10여년 전에 비해 위와 같은 ‘부사장’의 출몰이 확 줄었다. 한국관광호텔업협회에서 심사해 부여하는 특1급·특2급 등급의 호텔은 촘촘한 시스템을 갖추었다. 이를 뚫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망을 뚫는 스키퍼는 존재한다. 서울시내 특급호텔 5곳에 연간 스키퍼 발생 수를 묻자, 대부분 1~2년에 한두 건씩 스키퍼 사례가 일어난다고 밝혔다. 작은 액수의 스키퍼는 더 많았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한 특급호텔의 설명을 종합하면, 2007년 한 외국인 장기 투숙객이 묵었다. 두 달 넘게 숙박해 객실요금이 많았다. 중간정산을 하고도 40여만원의 객실료가 남았다. 체크아웃 때 이 투숙객이 건넨 신용카드가 승인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프런트 직원은 이 투숙객의 명함을 받아 남은 객실요금 청구서를 회사 팩스로 보내기로 했다. 투숙객은 떠났지만, 투숙객의 명함에 적힌 번호와 팩스 번호는 먹통이었다. 2주 동안 접속 안 되는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호텔은 결국 중간정산 때 사용한 신용카드에 강제 추징을 해 위기를 넘겼다. 객실 미니바에서 먹고 마신 뒤 체크아웃할 때 그냥 가는 경우도 많다. 서울시내 한 특급호텔은 미니바를 이용한 뒤 ‘튀는’ 스키퍼로 인한 손실이 매출액의 7~8%에 달한다고 밝혔다. 장기 투숙객은 금액이 커 보통 중간정산을 하는데 “체크아웃 때 한번에 결제하겠다”고 말한 뒤 도망가는 스키퍼도 있다고 이 호텔은 덧붙였다. 미니바 손실액이 전체 매출의 7~8%에 달하기도 이 때문에 특급호텔마다 스키퍼 대비책이 있다. 예약을 받을 때 신용카드 번호를 함께 받은 뒤 1000~2000원 정도 가승인을 받아 카드 사용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예약받을 때 현금으로 객실료의 일부를 보증금으로 받기도 한다. 언뜻 야박해 보이지만 호텔로서는 고육지책이다. 스키퍼가 파고드는 틈새가 특급호텔의 ‘고객 우선주의’이기 때문이다. 특급호텔마다 전화받기·응대하기 등과 관련해 방침이 있다. 직원들은 막무가내로 항의하는 손님에게도 함부로 화를 낼 수 없다. ‘고객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그들 노동의 황금률이다. 손님이 결제 방법과 시기에 대해 편의를 봐달라고 할 때 이를 거부할 특급호텔은 없다. 스키퍼는 그 틈새를 파고든다. 그 틈새에서 보이지 않는 전투가 벌어진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뛰는 안전 시스템 위 나는 그들을 잡아라 “대우전자 부사장 ㅅ아무개입니다.” 120수의 명품 정장 웃옷에 작은 대우전자 배지가 반짝였다. 아직 대우사태가 벌어지기 전인 1997년 봄, 그룹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프런트의 체크인 담당은 인수인계 파일을 곁눈질했다. ‘대우전자 부사장-익스프레스 체크인으로 처리할 것.’ 보통 예약 손님이 오면 외국인은 여권과 신용카드를 프런트에 맡기고 한국인은 명함이나 주민등록증과 신용카드를 맡겼다. 그러나 초특급 브이아이피들은 이런 절차를 뛰어넘는 익스프레스 체크인 혜택을 받았다. ㅅ부사장은 저녁 봄바람이 쌀쌀하다는 듯 옷깃을 여몄다. 최고급 양주 8병을 한꺼번에 주문 체크인 두 시간 뒤부터 룸서비스 전화에 불이 났다. ㅅ부사장이 최고급 양주 8병을 한꺼번에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특급호텔의 프리미엄 양주는 ‘액체로 된 금’이다. 시중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고급이 많다. “ㅅ그룹의 인수합병 문제로 부산에 있는 ㅅ그룹 대표이사를 만나는데 선물로 줄 술”이라는 부사장의 목소리는 근엄했다. 그러나 최고급 양주를 오밤중에 룸서비스로 올려보낼 처지가 된 식음 담당 지배인은 진땀을 흘렸다. 머릿속에서 ‘혹시…’ 하는 생각과 ‘브이아이피 고객의 주문’이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급한 대로 야간에 손님 접대를 총괄하는 당직 지배인의 서명을 받아 올려보냈다. 식음 담당 지배인은 다음날 아침 총지배인에게 불려갔을 때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사표 쓰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는 잠에서 깼다. 자칭 ‘부사장님’은 새벽에 양주를 쇼핑백에 우겨넣고 사라졌다. 물론 1400만원에 달하는 술값과 객실 이용료는 내지 않았다. “사표 내!” 복도까지 새나갈 만큼 데시벨 높은 총지배인의 목소리가 처음 전화로 예약을 받은 직원, 체크인 담당 직원, 식음 담당 지배인 등 세 직원의 심장을 찔렀다. 총지배인실을 나오고 나서 작전이 시작됐다. 식음 담당 지배인은 한 달 동안 업무가 끝난 뒤 경비실에 틀어박혀 폐쇄회로 카메라 녹화테이프를 보고 또 돌려 봤다. 한 달쯤 뒤 그는 당시 체크인 담당에게 조용히 전화를 걸었다. “잡으러 가자.” 당시 이 호텔에는 관할 경찰서의 외사계 형사 1명이 구석방을 빌려 수시로 출입하고 있었다. 테러국가로 지목된 나라의 투숙객 현황을 파악한다는 명분이었다. 평소 호텔 직원들 사이에서 불청객 대접을 받던 형사의 아침저녁 인사를 따뜻하게 받아줬던 건 오로지 식음 담당 지배인뿐이었다. 그게 도움이 될 줄 그도 몰랐다. 외사계 형사는 식음 담당 지배인이 찾아낸 번호판 사진을 근거로 수사에 나섰다. 차적 조회로 주소와 인적사항을 알아냈다. 프런트 직원은 대낮에 파자마 차림으로 붙들려 온 ‘부사장’이 경찰 조서 작성 때 밝힌 직업을 듣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아현동에 있는 중소 인쇄업체의 사장이던 그는 교회 장로이기도 했다. 식음 담당은 “부도난 회사를 살려보려 했다”는 사기꾼의 울먹임에 마음속으로 여러 번 연습했던 욕을 결국 던지지 못했다. 그러나 사기꾼의 반납 요청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미 매출 처리가 된 뒤였기 때문이었다. 대학교수인 사기꾼의 동서가 4교시를 마치자마자 경찰서로 뛰어와 신용카드 3개로 1400만원을 결제했다. 합의로 풀려난 ‘부사장’은 두 번 다시 스키퍼(skipper·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고객을 가리키는 호텔업계 용어) 노릇을 하지 않았을까? 최근 방한한 소피 마르소처럼 유명인을 보는 것은 특급호텔 직원들의 작은 기쁨이다. 늘 상류사회를 만나는 이들에게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은 첫째 의무다. 손님을 대하는 말의 어미, 시선 처리 하나하나가 프로페셔널리즘의 결과다. 손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 감정노동의 틈새를 노리는 존재가 있다. 스키퍼다. 시스템이 정교해진 지금은 10여년 전에 비해 위와 같은 ‘부사장’의 출몰이 확 줄었다. 한국관광호텔업협회에서 심사해 부여하는 특1급·특2급 등급의 호텔은 촘촘한 시스템을 갖추었다. 이를 뚫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망을 뚫는 스키퍼는 존재한다. 서울시내 특급호텔 5곳에 연간 스키퍼 발생 수를 묻자, 대부분 1~2년에 한두 건씩 스키퍼 사례가 일어난다고 밝혔다. 작은 액수의 스키퍼는 더 많았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한 특급호텔의 설명을 종합하면, 2007년 한 외국인 장기 투숙객이 묵었다. 두 달 넘게 숙박해 객실요금이 많았다. 중간정산을 하고도 40여만원의 객실료가 남았다. 체크아웃 때 이 투숙객이 건넨 신용카드가 승인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프런트 직원은 이 투숙객의 명함을 받아 남은 객실요금 청구서를 회사 팩스로 보내기로 했다. 투숙객은 떠났지만, 투숙객의 명함에 적힌 번호와 팩스 번호는 먹통이었다. 2주 동안 접속 안 되는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호텔은 결국 중간정산 때 사용한 신용카드에 강제 추징을 해 위기를 넘겼다. 객실 미니바에서 먹고 마신 뒤 체크아웃할 때 그냥 가는 경우도 많다. 서울시내 한 특급호텔은 미니바를 이용한 뒤 ‘튀는’ 스키퍼로 인한 손실이 매출액의 7~8%에 달한다고 밝혔다. 장기 투숙객은 금액이 커 보통 중간정산을 하는데 “체크아웃 때 한번에 결제하겠다”고 말한 뒤 도망가는 스키퍼도 있다고 이 호텔은 덧붙였다. 미니바 손실액이 전체 매출의 7~8%에 달하기도 이 때문에 특급호텔마다 스키퍼 대비책이 있다. 예약을 받을 때 신용카드 번호를 함께 받은 뒤 1000~2000원 정도 가승인을 받아 카드 사용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예약받을 때 현금으로 객실료의 일부를 보증금으로 받기도 한다. 언뜻 야박해 보이지만 호텔로서는 고육지책이다. 스키퍼가 파고드는 틈새가 특급호텔의 ‘고객 우선주의’이기 때문이다. 특급호텔마다 전화받기·응대하기 등과 관련해 방침이 있다. 직원들은 막무가내로 항의하는 손님에게도 함부로 화를 낼 수 없다. ‘고객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그들 노동의 황금률이다. 손님이 결제 방법과 시기에 대해 편의를 봐달라고 할 때 이를 거부할 특급호텔은 없다. 스키퍼는 그 틈새를 파고든다. 그 틈새에서 보이지 않는 전투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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