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패션 유학생 칼 든 이유

등록 2009-07-01 21:39수정 2009-07-01 21:40

조선호텔 한석원 주방장의 모리바시
조선호텔 한석원 주방장의 모리바시
[매거진 esc] 너는 내운명




조선호텔 한석원 주방장의
모리바시

90㎝ 길이의 모리바시(오른쪽 사진 맨 아래)를 오른손에 쥔다. 30명이 넘는 일본인 요리사들의 눈이 왼손의 모리바시와 오른손의 50㎝ 길이 회칼에 쏠린다. 손을 대지 않고 붕어를 회 치는 게 어려운 건 몸에 꼭 끼는 유타카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 주방에서 사용하는 모리바시보다 세 배 긴 모리바시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손가락에 힘을 줘도 붕어 옆구리에서 미끄러지기 일쑤다. 손을 대지 않고 긴 모리바시만으로 생선을 회 쳐 그 위에 보기 좋게 오이를 올려야 한다. 모리바시는 음식을 용기에 담을 때 쓰는 젓가락이다. 한국인들이 많이 쓰는 와리바시는 ‘붙어 있는 젓가락’을 뜻한다. 일본 요리사들은 동문수학한 스승과 동료가 유대 모임인 가이(會)를 만든다. 오야지(우두머리)와 선배들 앞에서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는 일종의 ‘칼 의식’이 호초시키(包丁式)다. 스즈키가 오야지인 이 모임에 한국인이 호초시키를 한 건 서울웨스틴조선 일식당 스시조의 한석원(45) 주방장(사진)이 전무후무했다.

조선호텔 요리사 한석원 주방장
조선호텔 요리사 한석원 주방장
야채를 썰 때 쓰는 우스바(오른쪽 사진 맨 위)는 일본에서 요리 공부를 하던 1991년 스승 모타이 겐지한테서 받았다. 그 칼을 받던 18년 전 일본의 한국인 요리 유학생 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네가 주방장이 되면 사용하라”며 스승은 칼을 건넸다. 가이는 위계보다 정에 근거한 조직이다. 자신이 아끼는 칼을 제자에게 주는 것도 그런 문화의 일부다. 문어 써는 칼인 다코히키(오른쪽 사진 가운데)를 줬던 우자와는 나이는 동갑이지만 요리에서는 선배였다. 우스바, 모리바시, 다코히키 모두 그것을 준 요리의 오야지를 상징한다.

89년 처음 일본에 갔을 때 한 주방장은 요리가 아닌 패션 유학생이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귀걸이와 팔찌 등 액세서리를 사다 고향 부산에서 좌판을 깔고 팔던 생활력 강한 의류학도. 그게 89년의 한 주방장이었다. 일본 학생들은 예상보다 더 패션 감각이 뛰어났다. 학교에 입학한 뒤 몇 달이 지나 한 주방장은 밤늦게 비디오를 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교복을 입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패션 감각의 갭을 도저히 좁힐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에 잠을 설쳤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레스토랑 ‘마사오’의 사장도 한 주방장을 의류학도에서 요리사로 변화시킨 한마디를 날렸다. 그는 한 주방장이 손님에게 싹싹하게 대하고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는 모습을 눈여겨봤다. “너는 패션보다 이쪽(요리) 무끼다.” ‘무끼’(むき)란 ‘방향’이란 뜻이다.

94년부터 주방장으로 일하는 스시조(02-317-0373)에서 다행히 우스바를 물려주고 싶은 후배를 발견했다. 오야지란 말은 한국인에게 조폭을 연상시킨다. 때리고 명령하는 권위적인 존재다. 그러나 한 주방장에게 오야지는 인생을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준 롤 모델이다.

글 고나무 기자·사진 박미향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