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호텔, 부관페리 3등칸 객실. 청춘 시절 현해탄의 추억 많은 어르신들과 함께 잤다. 김형렬 제공
[매거진 esc] 김형렬의 호텔에서 생긴 일
세상만사 벌어지는 이곳에서의 달콤살벌 요절복통 천일야화
세상만사 벌어지는 이곳에서의 달콤살벌 요절복통 천일야화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라는 광고 카피만이 아니다. 엄마가, 아내가 잘 차려주는 밥상도 뒤로한다. 뜨끈한 온돌 혹은 원터치 에어컨에 냉온수 좔좔 샤워 걱정 없는 내 잠자리도 멀리한다. 살짝 미치면 월급 나오고 연차도 올라가는데, 사표 던져 기회비용까지 날리도록 한다. 중독돼 때만 되면 도져 사서 고생하는 이것, 뭘까? ‘여행’. 이것 말고 다른 답이 있을 수 있나?
일찍이 나는 이 나라 말고 다른 나라 땅덩어리에 내 발자국을 찍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나라 밖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근엄한 분들이 비행기 안에서 아리따운 언니들한테 식사 대접받으면서, 샹들리에 드리운 호텔에서 머무는 게 해외여행이었다.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에도 시민이 여권을 받는 것은 서울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뒤 외무부 여권과에서만 가능했다. 여기에다 ‘국가안전기획부’라는 사뭇 무시무시한 기관에 가서 ‘무찌르자 공산당’식 정신교육을 받은 딱지를 첨부해야 했다. 국가가 내 머릿속으로 무엇이든 밀어넣으려 했던 빵꾸똥꾸 같은 시절 얘기다.
그렇게 여행은 시작됐다. 불온한(?) 신문을 열심히 팔아 모은 돈을 허리춤에 차고, 경부고속도로 신갈인터체인지 부근에서 히치하이크로 부산행 컨테이너트럭에 올랐다. 해서 나의 첫 여행은 근엄한 분들이 날아다닌 것과는 반대로, 나라 잃은 자들이 밀항하듯 물 위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나의 나라 밖 첫 호텔(?)은 부관페리 3등칸이 되었다. 3등칸도 감지덕지였지만, 교실 넓이의 마룻바닥에 스펀지베개 하나 받아 알아서 자는 칸이었다. 그럼에도 3등칸 바닥 비비댄 등바닥에 콩콩콩 울려오는 스크루 엔진의 낮은 토악질에 부관페리의 잠 못 이루는 밤이 나를 밤새 달뜨게 했었다. 드디어 대한민국이 아닌 곳에서 첫 잠을 잤도다! 감개무량.
이튿날 아침 페리는 시모노세키의 외항에 이미 닻을 내렸고 6월의 남국 바다 볕이 중천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복대 안 지폐 수를 떠올리자, 오늘밤엔 어디서 돈 안 들이고 등짝을 붙일 것인지 스멀스멀 걱정이 되었다. 고속도로 위로 걸어올랐다. 4시간 갓길 도보 끝에 트럭 한 대를 잡아타는 데 성공. 도쿄까지 왕복 2000㎞ 히치하이크 종주의 막이 올랐다. 운전사들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마다 나를 릴레이해 실어날랐다. 이리하여 그날 밤 나의 생애 두번째 호텔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성 공원 나무 밑이었다. 배낭 위에 묶어간 슬리핑백이 나의 침대였고, 오사카의 초롱초롱 별빛이 샹들리에였다.
그렇게 89년에서 90년대 중반까지 세계로 떠났던 서태지 세대 배낭족들의 잠자리는 노숙에서부터 게스트하우스, 민박, 유스호스텔까지가 다였다. 나라가 부도나고 정권이 바뀌고 아이티(IT)혁명이 일어나고 세계화가 번지고 새순이 솟고 다른 나라가 이웃인 시대에 들어서자 ‘호텔’이 우리 곁에 서 있었다. 잠뿐 아니라, 결혼도, 생일도, 목욕도, 운동도, 정치도, 쇼도, 그리고 메이킹러브도 세상사 모든 일이 호텔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호텔이 언감생심이었던 시절은 유럽 무전여행 무용담 저 뒤편으로 가버렸다. 집 나가는 우리는 홀리데이 인으로, 파크 하얏트로, 그리고 호텔 캘리포니아로 가고 있는 중이다.
김형렬 호텔자바 이사 www.hoteljav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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