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중급 호텔의 객실, 장이냐 호텔이냐. 김형렬 제공
[매거진 esc] 김형렬의 호텔에서 생긴 일
여인숙-여관-모텔-호텔로 이어져온 잠자리 등급에 관한 단상
여인숙-여관-모텔-호텔로 이어져온 잠자리 등급에 관한 단상
호텔에 대한 오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필자도 직장생활을 하기 전까지 호텔은 높은 지위에 있거나 돈이 많거나 혹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만 가는 곳인 줄 알았다. 호텔 문마다 지키고 선 꼬리 달린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 때문에도 그랬다. 비행기도 아무나 탈 수 없던 시절이었다. 1989년 이전까지 아무나 외국엘 갈 수도 없었다. 호텔은 우리의 정신 밖에 서 있었다. 대신 우리에겐 여관과 여인숙이 있었다!
여인숙은 여인들이 자는 곳인가, 라는 의문이 어린 시절 내내 가시지 않았다. 그땐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남녀 각 반이었고, 여중-여고-여대를 가는 것이 지당했으니, 여관은 남녀가, 여인숙은 여자만 자는 곳이란 불온하나 당연한 상상을 했다. 그러다가 스무살 대학생이 되어 동기들과 막걸리에 소주에 1, 2, 3차 마시고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비데오 감상’이란 광고판이 붙은 ‘여관’이었다. 우리 또래 최초 ‘여관리뷰’는 연애도, 여행 때문도 아닌 14인치 컬러텔레비전으로 벌거벗은 금발여인 감상기였다. 그래서 비디오가 있으면 여관, 없으면 여인숙, 이것이 잠자리 등급이기도 했다.
어른이 됐어도 호텔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그보다 호텔은 ‘워터게이트 사건’(워싱턴DC 워터게이트호텔), ‘G5 플라자 합의’(뉴욕 플라자호텔), ‘김대중 납치사건’(도쿄 그랜드팔레스호텔)처럼 역사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호텔에 대한 이런 트라우마는 아시아인들에게만 있는 것이다. 한국의 ‘아파트공화국’ 연구로 유명한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일본, 중국, 한국에서의 호텔은 19세기 서구가 동아시아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집권층과의 접견과 사교의 장으로 출발했으며, 이것이 보통 사람들에게 낯선 이질감으로 남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의 의식 속엔 여인숙-여관-모텔-호텔의 순서로 랭킹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여인숙은 지방 중소도시 뒷골목 아니면 이젠 찾기도 어려워졌고, 여관도 단어가 주는 왠지 칙칙한 느낌 때문에 ‘무슨무슨 장’으로 탈바꿈했다. 모텔은 장과 경계가 모호하지만 한국식 부티크호텔과 러브호텔이 섞인 것쯤으로 젊은 층 사이에는 인식되는 것 같다. 머리의 제일 꼭대기에 자리잡은 호텔은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이를테면 이렇다. 호텔은 커야 한다. 고층 빌딩에 세련되고 현대식 풍모에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신기하거나 고급스런 설비를 갖춰야 한다. 통유리에 회전문이 있어야 하고, 로비는 럭셔리한 샹들리에가 유럽 분위기를 풍기며 넓어야 한다. 패키지 여행에 갔다가 ‘호텔이 별로였어’라는 분들 얘기 들어보면 ‘로비가 같잖다’는 말과 통한다. 유럽 여행 다녀온 어르신들, “아니, 파리의 호텔이 우리나라 장급만도 못해”라며 잠자리 푸대접에 분개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호텔(hotel)의 어원은 ‘호스트’(host)를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왔단다. ‘host’는 ‘접대하다’이다. 잠자리와 식사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집 나선 이들에게 가장 필수적인 서비스를 베푸는 곳이 호텔인 것이다. ‘호스텔’(hostel)도 같은 뿌리이며, 몸이 불편하여 구호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병원(hospital)도 마찬가지다. 호텔은 집 밖에서 돈 내고 자는 곳이면 어디든 해당된다. 여인숙도 여관도 다 호텔이라 할 수 있으니, 샹들리에 없는 장급보다 못한 호텔도 세상에는 부지기수일 수 있겠다. 호텔은 여관과 동급이다.
김형렬 호텔자바 이사, www.hoteljav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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