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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랑 잘 마셔? 그럼 인간성 좋은 거야

등록 2010-03-31 20:29수정 2010-04-04 10:21

술꾼 임범은 대화를 위해 술을 마신다. 다양한 술을 마시느냐는 그가 한 사회를 이해하는 척도다. 그가 가장 즐기는 술은 보드카 레몬이다.
술꾼 임범은 대화를 위해 술을 마신다. 다양한 술을 마시느냐는 그가 한 사회를 이해하는 척도다. 그가 가장 즐기는 술은 보드카 레몬이다.
[매거진 esc] 섞어 마시는 걸 즐기지만 다양한 취향 존중하는 술꾼 임범과의 대화
“무질서하게 뻗은 도로, 옛 소련 스타일의 콘크리트 아파트, 끔찍한 오염, 영혼도 마음도 없는 지겨운 단조로움이 사람들을 알코올 중독으로 내몬다.” 어느 지역에 대한 묘사일까? 지난해 10월 미국의 여행전문지 <론리 플래닛>은 최악의 도시를 뽑았다. 이 매체는 서울을 3위로 뽑고 그 이유로 한 여행자의 위와 같은 평가를 제시했다. 서울을 포함해 중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을 의도적으로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다. 1위가 미국 디트로이트, 4위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5위가 영국 울버햄프턴 등 선진국 도시가 상위에 뽑혔다. 정치한 분석이라기보다 인상비평에 가깝다. 한국인들이 죄다 알코올 중독자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술에 관한 한 한국이 단조롭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술 좀 다양하게 마셔보자”고 주장해온 술꾼 임범의 지론과 닿아 있다. 오랫동안 <한겨레> 신문기자였다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밥벌이는 달라졌지만 술자리 원칙은 동일하다. 첫째, 이것저것 다양하게 마신다. 둘째, 술보다 말을 더 많이 ‘마신다.’ 막걸리 열풍부터 싱글 몰트위스키까지 지난 한 해 술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지난 25일 그와 만나 술에 대해 대화했다. 그는 대담이라는 딱딱한 말보다 수다라고 써달라고 말했다. 오후 4시 석양이 지는 인사동의 한 카페에 앉자 그는 술부터 주문했다. 술꾼과의 대화에 석양주가 제격이라며.

에스프레소와 맥주의 콘 비라, 기분이 묘하더라

고나무 기자(이하 고) : 와인은 별로 안 좋아하시나요?

임범(이하 임) : 와인? 잘 못 마셔. 이상하게 와인하고 사케(일본식 청주)가 안 맞더라고. 제일 좋아하는 건 간단한 칵테일이지.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칵테일만 파는 곳이 많지 않아서 집에서 섞어 마실 때가 많지. 토닉 워터랑 보드카랑 많이 섞어 마셔.

고 : 제 친구 녀석 가운데도 봄베이 진(영국, 네덜란드에서 많이 마시는 무색투명한 증류주)을 많이 마셨죠.

임 : 어떤 술이 자신과 맞고 안 맞고는 체질과도 관련 있지만 습관인 것 같기도 해. 봄베이 진은 나도 꽤 마셨는데 진 토닉(진과 토닉 워터를 섞은 칵테일), 보드카 토닉이 좋더라구.

고 : 도저히 봄 날씨라고 보기 어렵네요. 왜 이렇게 추운지. 맥주 한잔 들어가니 좋네요.


임 : 맥주 좋아한다면 혹시 콘 비라 들어봤어? 에스프레소랑 맥주를 섞은 건데, 굉장히 고소한 흑맥주 맛이 나. 맛있어.

고 : 그런 게 있어요? 저도 맥주 좋아하는 편인데 ‘콘 비라’는 처음인데요? 원래 이탈리아 사람들이 먹는 건가요?

임 : 실은 나도 친한 카페 주인 양반한테서 배운 거야. 어느 날 불쑥 나한테 ‘콘 비라 한번 먹어볼래?’ 이러더라고. 마셨는데 나쁘지 않더라. 맥주는 취하게 하는데 커피는 각성 효과가 있잖아. 한잔 들이켜면 기분이 묘해.

고 : 주량은 그대로신가요?

임 : 요샌 술 그리 잘 못 마셔. 주량도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었어. 이틀만 마셔도 몸이 안 좋아. 하루 한번 마시면 최소 이틀은 쉬자, 뭐 그런 주의지.

고 : 술꾼은 술을 즐기는 사람이지 많이 마시는 사람은 아니죠.

임 : 자 한번, 마셔볼까? 에스프레소를 먼저 맥주잔에 따라 식히자. 주의할 점은 맥주를 너무 빨리 따르면 거품이 확 올라와.

술꾼 임범이 가장 즐기는 술 보드카 레몬(왼쪽).
술꾼 임범이 가장 즐기는 술 보드카 레몬(왼쪽).

더블린 공항 탑승구 앞 펍에 부러움 느껴

콘(con)은 이탈리아어로 ‘~과 함께’를 뜻한다. 영어의 ‘위드’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에스프레소 콘 비라’ 또는 ‘카페 콘 비라’가 정식 명칭이 된다. 그러나 기원은 불분명하다. 위키피디아나 구글에서도 검색 결과가 없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를 나온 ‘누이누이’의 박찬일 주방장도 “그라파(포도주를 증류한 술)와 에스프레소는 섞어 마시는 걸 봤지만 맥주와 에스프레소를 섞어 마시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에스프레소 더블 한 잔이랑 맥주 두 병을 주문했다. 기원이야 어쨌든 마실 만했다.

고 : 정말 거품이 확 올라오네요. 흠.

임 : 여름에 많이 마셔. 오후에 배가 슬슬 출출해질 때 식전에 딱 한 잔 이걸 마시는 거지. 알딸딸하면서도 동시에 커피가 머리를 각성시키니까 한편 술이 깨. 알코올과 커피가 묘하게 길항 작용을 일으키는 게 괜찮더라고.

고 : 바디(액체의 묵직한 정도)도 느껴지고 맛도 나쁘지 않네요. 고소한 커피향이 올라오는 게 재밌는 맛이군요.

임 : 다른 매체에 이걸 소개했더니 댓글이 달렸더라고. ‘별걸 다 섞는다’라고 말이야. 차라리 고추장이랑 술을 섞지 그러냐는 비아냥도 있더라. 그런데 왜 음식을 섞으면 안 되지? 그렇게 이것저것 섞다 보면 거기서 또 명품이 나오는 거 아닐까?

고 : 저도 맥주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것저것 섞어 마시는 재미도 분명 있죠.

임 : 에스프레소에 맥주를 따르니까 거품이 기네스 흑맥주처럼 올라오지? 겉으로 보면 거품이 내려가는 것처럼 말이야.

고 : 흑맥주 거품 내려가는 모양을 ‘캐스케이드’라고 부르죠.

임범
임범

임 : 아일랜드 더블린 공항에서 기억나는 장면이 있지. 우리네 공항에도 물론 식당도 있고 거기서 술도 팔지만 술집은 없잖아? 더블린 공항에는 보안검색을 끝내고 비행기 탑승구 바로 앞에도 펍이 있더라고. 비행기 타기 직전까지 거기서 맥주를 홀짝이는 거지. 술꾼으로서 어찌나 부럽던지, 흐흐.

고 : 선배가 칵테일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사실 여전히 널리 알려진 건 아니죠.

임 : 그래도 사람들 취향이 많이 다양해진 것 같아. 좀 거창하지만, 취향이 다양한 사회가 진짜 다양한 사회 아니겠느냐고. 많이 마시는 것보다 알고 마시면 더 재미도 있고 말이야. 나도 술에 대해 이것저것 찾다 보니까 알게 된 사실도 있어. 몇 년 전부터 멕시코 정부가 테킬라 상표를 관리하는데. 수출용에 한해서 테킬라 원액이 51%만 넘으면 여기에 설탕, 시럽 등 다른 성분을 섞어 만든 것도 테킬라라는 상표를 달 수 있도록 바꿨지. 이렇게 원액과 다른 성분을 섞은 걸 믹스토라고 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대부분의 테킬라가 실은 믹스토야. 그러니까 진짜 용설란(아가베)으로 만든 테킬라인지 구별하려면 상표를 잘 봐야 해. ‘100% 아가베’라는 표시가 있어야 진짜배기지. 100% 아가베로 만든 테킬라를 마셔봤는데, 달지 않더라고. 맛이 담백해. 다음날 뒤끝도 없고.

멕시코의 식물인 용설란(아가베)을 증류해 만든 술을 통틀어 메스칼(mezcal)이라 부른다. 테킬라는 멕시코의 테킬라 지역에서 만든 메스칼을 일컫는다. 테킬라가 너무 유명해져 보통명사처럼 사용되는 셈이다.

영화 속의 술 이야기 <씨네 알코올> 출간

고 : 술버릇이 있으세요?

임 : 요샌 취하면 그냥 자. 말이 좀 많아지는 경향이 있지. 좋은 술꾼이 되려면 약간 의식적인 노력도 필요한 것 같아. 술 마실 땐 너무 까탈부리면 안 돼. 말도 일방적으로 자기만 하면 안 되지. 그래서 나는 후배들이랑 일부러 자주 술 마시려고 노력해. 선배들 말고. 후배들하고 술 많이 마시는 애들이 인간성이 괜찮다니까. 후배들이 술 마셔 준다는 건 후배들이 그 사람에게 그만큼 부담을 안 느낀다는 거니까. 또 세상에 호기심이 있다는 거고. 다양한 술을 마셔보는 게 가장 쉽게 다른 나라를 느끼는 문화적 체험인 거 같아. 그래서 이것저것 자꾸 마셔봐. 그나저나 술 더 맛있게 마시려면 운동을 좀 해야 할 텐데 말이야.

취향은 세상을 이해하는 프리즘이다. 기자 임범은 영화제작자 임범이 됐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그는 술꾼 임범이다. 사람들이 어떤 술을, 어떻게 마시는지 관찰하는 일은 그가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안경이다. 그 안경을 쓰고 영화를 봤다. <캐리비안의 해적>에 왜 럼이 등장하는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등장하는 일본 위스키가 극중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분석했다. 곧 <씨네 알코올>이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묶어 낸다. 그의 지론에 따르자면 취향이 다양한 사회는 건강하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시각으로 그 사회를 바라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술꾼 임범에게는 그 척도의 하나가, 술이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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