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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돈 내고 잠만 자면 무슨 재미

등록 2010-04-21 18:26수정 2010-04-21 19:39

국경 넘은 디스코 나이트. 김형렬 제공.
국경 넘은 디스코 나이트. 김형렬 제공.
[매거진 esc] 김형렬의 호텔에서 생긴 일




온갖 ‘텔’들에서 ‘섬싱’을 조장하는 법

호스텔이 군대 내무반 같으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상 끝줄에 정렬하고 나란히 눕지만 자다 보면 뒤엉킬 수밖에 없는 내무반이, ‘섞여 잔다’는 호스텔과 혼선을 빚은 것 같다. ‘혹시 혼숙?’ 하는 삐딱한 시선도.

진상인즉 이렇다. 호스텔의 주요 객실은 ‘도미토리’라 불리는 다인실이다. 이 방에는 벙크베드(2층 침대)가 2개에서 4개까지 있다. 침상 마루에서 일렬로 함께 자는 내무반식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아래 침대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위 침대의 백인 여자가 하얀 어깨를 드러내며 내려다보니 섞여 자는 것일 수밖에.

그런데 막상 실제 이 상황에 닥치면 호기심보다는 문화적 충격이 상상 이상이다. 심지어 이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배시시 웃으며 “Don’t you bring me some water over there?” 이러면 눈길과 몸짓이 따로 놀면서 오토매틱으로 움직이게 된다. 솔직히 “웬 횡재?” 하는 머릿속 계산(?)이 분주해지면서 혼미한 상태가 된다. 결국은 김칫국만 꼴깍거리다가 이메일 교환으로 정리가 되지만, 바에서 흑맥주를 들이켜는 것까지는 어려운 작업도 아니다. 그래서 호스텔 방랑이 길어지면, 다음 도시에서는 내 상하좌우에 누가 들어올까 하는 기대감(또는 흑심)마저 스멀거리게 된다.

호스텔에 따라서는 아예 멍석을 깔아주기도 한다. 런던 제너레이터 호스텔은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에 ‘디스코 나이트’가 열린다. 가라오케 시설과 사이키 조명의 스테이지까지. 그리고 당연히 술과 음식이 제공된다. 투숙중인 선남선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친구들까지 초대돼 입장한다. 물론 강남 부킹 나이트랑 수질은 사뭇 다르다. 대신 금발 뽀사시한 스웨덴 여인, 까무잡잡 아담 사이즈의 스페인 언니, 콧소리 낭랑한 패셔너블 프렌치걸, 그리고 덧니에 액세서리로 포장한 일본 ‘OL’까지 각국 대표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밤이 깊어질수록 ‘외국어 공부 좀 열심히 해둘 걸’ 하는 후회가 이때 가장 크게 밀려온다. 여기서도 작업의 정석은 화려한 입담이니.

집 밖에서 잠을 자는 이상 ‘섬싱’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다. 호텔은 섬싱을 지원 혹은 보장하는 시설의 총집합소다. 맥주와 위스키가 들어찬 미니 바와 성인물 쏟아지는 유료 티브이, 그리고 킹사이즈 침대의 침실은 그 기본이고, ‘아웃도어 풀’과 사우나, 마사지가 곁들어진 스파, 수영장과 체력단련시설, 전망 좋은 레스토랑과 퓨전 산해진미, 위스키·코냑·럼·라이브재즈 등등 언제든지 섬싱용 소도구로 동원 가능한 것들이다.

언젠가 영국의 한 잡지가 설문조사를 벌였다. ‘해외여행에서 로맨스를 기대하느냐?’고. 3분의 2 이상 남녀노소가 ‘그렇다’고 답했고, 여성 비율이 남성보다 높았다. 어쩌면 여행은 풍광 유람이 아니라 로맨스의 달림이다. 2부작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그 결정판이다. 그러니 호텔은 잠자는 곳이 아니다. 모텔·오피스텔·고시텔·원룸텔·리빙텔·시티텔·웰빙텔·남성전용휴게텔까지 ‘텔’자 돌림의 호텔 사촌들까지 그렇게 사랑하는 우리들이 비싼 돈 주고 등짝만 붙이고 나온다면 그게 무슨 재민가? 호텔은 잠도 자는 곳이다.

김형렬 호텔자바 이사 www.hoteljav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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