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기나길게만 여겨졌던 설 연휴도 다 지나버렸습니다. 지나고 나면 아주 짧은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형제자매, 친지들과 행복한 시간 보내셨나요? 술 한잔 기울이고 윷놀음 한판 벌이며 여기저기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들 털어내셨나요? 명절이 도리어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하지요. 여성 동지들께 명절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형제자매, 친지가 모여 서로 시새우고 속은 뒤보깨는 탓에 험한 사고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마음 열고 서로의 가슴속 일들에 조용히 귀 기울여 볼 일입니다.
즐겁고 신나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싶지만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네요. 설 연휴 내내 지상파 티브이에선 지치도록 ‘아이돌’들을 불러냈고 뉴스는 소말리아 해적 이야기로 도배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엔 소와 돼지 300만 마리의 환영들이 가득했던 듯합니다. 삶의 위기에 빠진 1000만 농민의 아우성은 귓전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이 씻을 수 없는 죄악은 누구의 몫일까요. 무명 시나리오 작가가 한 그릇의 밥, 한 모금의 물이 없어 숨진 일도 벌어졌습니다. 입은 있으나 할 말을 잊고 맙니다. 예술에 대한 사망선고입니다.
고 이태석 신부의 숭고한 삶은 눈물을 자아냈습니다.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이, 이 신부의 삶을 만들었습니다. 훌륭한 이들 뒤엔 늘 더욱 훌륭한 이들이 있더라는 예외 없는 법칙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나간 것들은 다시 옵니다. 죽임과 죽음도 다시 올 테고, 죽음을 통해 생명을 일구는 숭고함도 부활할 것입니다.
정초부터 무거운 이야기들을 늘어놨습니다. 현실을 외면한 즐거움과 재미는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제 발이 놓인 땅 위에서 신나는 일을 벌여야 할 일입니다. 진짜 감동과 흥겨움은 땅 위에서 이뤄지더라는 겁니다. 뭐 신나는 일 없을까요?
김진철 팀장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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