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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바텐더의 막걸리칵테일 맛은?

등록 2011-02-10 13:14수정 2011-02-10 13:44

에리크 로린츠가 막걸리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
에리크 로린츠가 막걸리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
[매거진 esc]
‘월드클래스 2010’ 우승자·준우승자, 우리술 칵테일에 도전

“나는 아내가 없는 동안 일만 열심히 할 거야.” 출판사 편집장 리처드 아서는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뜨거운 맨해튼의 여름을 피해 시골로 휴가를 떠난 아내 헬렌과 아들 리키. 혼자 남은 결혼 7년차 유부남 리처드 아서는 서서히 달아오르는 도시의 아스팔트처럼 일탈의 욕망이 피어오른다. 마술처럼 ‘금발의 미녀’가 그의 앞에 나타난다. 마릴린 먼로다.

영화 <7년 만의 외출>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화마니아라면 장면마다 깔린 복선과 권태기에 접어든 중년 남자의 심리를 짓궂게 표현한 장치들에 열광하겠지만 칵테일 마니아라면 딱 한 장면에 눈동자가 고정된다. 두 사람이 마티니를 주고받는 장면이다. 자고로 칵테일은 사랑의 술이라고 했다. 리처드가 만든 500㏄ 맥주잔만한 큰 컵의 마티니를 받아든 마릴린 먼로는 한 모금 마시고 “윽” 소리를 내면서 “설탕을 더 넣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리처드는 “아니, 아니, 마티니에는 설탕을 넣지 않아요”라고 답한다.

세계 최고 바텐더, “막걸리에 고향 냄새 난다”

‘칵테일의 왕’이라고 불리는 마티니에는 설탕이 들어가지 않는다. 주로 식전주로 마시는 마티니는 음식을 먹기 전에 입맛을 돋우는 술이다. 그런 이유로 단맛이 적고 산뜻한 맛이 특징이다. 전통적인 방식에 익숙한 바텐더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단정해버리겠지만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바텐더라면 다를지 모른다. 바텐더란 세상 존재하는 모든 술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술을 만드는 이들이다.


(왼쪽부터)  ‘올드 파머’ 에리크 로린츠의 막걸리 칵테일, 엄도환 바텐더가 만든 막걸리 칵테일 ‘스노맨’.
(왼쪽부터) ‘올드 파머’ 에리크 로린츠의 막걸리 칵테일, 엄도환 바텐더가 만든 막걸리 칵테일 ‘스노맨’.
세계바텐더대회인 ‘월드클래스 2010’ 우승자인 에리크 로린츠(31·영국 런던 ‘코노트바’·오른쪽 사진)가 지난달 16일 우승자 자격으로 강연과 우승 칵테일을 소개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월드클래스 대회는 주류회사 디아지오가 주최하고 올해로 3회를 맞는 세계바텐더대회다. 지난해 세계 24개국 바텐더 9000여명이 도전해서 24명의 바텐더만이 최종 심사에 올랐다. 국제바텐더협회(IBA)가 주최하는 대회가 역사가 오래되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린다면 월드클래스는 좀더 창의적인 스타일을 추구한다. 6가지 도전 과제 중에는 바텐더에게 40유로만 지급하고 직접 재료를 사서 다른 형태의 두가지 칵테일을 10분 만에 만들게 하는 것도 있다. 한국의 엄도환(34·호텔 리츠칼튼 서울 ‘더 리츠바’) 바텐더는 준우승을 했다.

창의적인 바텐더는 처음 맛본 술로도 황홀한 맛의 칵테일을 만들 수 있을까? 로린츠는 한국을 방문해서 처음 맛본 술이 막걸리라고 한다. 문득 궁금해진다. 막걸리나 우리 전통주로 만든 칵테일은 어떤 맛일까? 그에게 부탁했다. “물론 가능하다. 모든 술이 재료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재료의 배합과 균형이다.” 궁합이 중요하다는 소리다. 구운 스테이크 위에 설탕을 뿌려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오크통에서 오랫동안 숙성하는 위스키나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 진, 럼, 보드카 등을 주재료로 썼던 로린츠에게 쌀과 누룩, 물을 섞어 발효, 숙성시킨 우리 막걸리는 낯선 술이다. 그는 낯설지만 흥분되는 여행을 시작했다.



에리크 로린츠(31·영국 런던 ‘코노트바’·오른쪽 사진)
에리크 로린츠(31·영국 런던 ‘코노트바’·오른쪽 사진)
그의 손에는 ‘서울장수생막걸리’가 있었다. 눈을 감고 한 모금 음미한다. “고향 생각이 난다. 농부의 음료 같다. 효모의 느낌도 느껴진다.” 그의 고향에는 와인을 만드는 농부인 아버지가 있다고 한다. 포도밭 사이에서 땀 흘리고 있을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그는 우선 달걀노른자를 추출한다. 분자요리를 만드는 셰프 같다. 노른자는 “다양한 맛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실”을 한다고 한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도구상자에서 서양 박물관에서 볼 법한 황동으로 된 잔을 꺼낸다. 그 잔에는 노른자와 시럽, 싱글몰트 위스키가 들어간다. 진지한 표정에서 심혈을 기울이는 정성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걸쭉한 우리 막걸리가 합류한다. 그는 살짝 미소를 비치더니 묘기를 시작한다. 현란한 칵테일 쇼는 아니다. 재료가 섞인 잔을 높이 들어 다른 손에 들고 있는 빈 잔에 다 쏟아붓는다. 우아하고 아슬아슬한 긴 포물선이 그려졌다. 재료는 한 방울도 이탈하지 않은 채 이 잔에서 저 잔으로 여러번 이동한다. 혼합기 통에 재료를 넣고 춤추며 흔드는 현란한 쇼와는 다른 전통적인 방식이라고 한다. “막걸리는 전통적인 방식을 사용하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과정이 끝나자 얼음을 퐁당 담근다. 완성이다. “막걸리는 다재다능한 술이다.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다.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데 노력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에리크 로린츠’표 막걸리 칵테일에 ‘올드 파머’(Old Farmer)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의 물방울> 식으로 표현하자면, ‘올드 파머’의 맛은 가을바람 부는 수확기에 낫을 든 늙은 농부의 굵고 주름진 손의 강인함 같은 맛이다.

솔송주와 어우러진 동서양 배의 조화

로린츠는 자신이 만든 술에 대해 마지막 평가를 했다. “좋아하는 이와 싫어하는 이가 극단적으로 나눠지는 맛이다.”

두번째, 그의 우리 술 도전은 지리산 자락의 맑은 물을 벗삼은 우리 전통주 ‘솔송주’다. 530여년의 역사를 가진 솔송주는 솔잎, 송순, 누룩, 멥쌀, 지리산 암반수를 원료로 발효시킨 약주(13도)와 20여일 발효한 뒤 증류한 술(40도), 두가지다. 조선시대 학자 정여창의 16대손 며느리인 박흥선씨가 맥을 잇고 있는 명주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차 북한을 방문할 때 우리 쪽이 준비한 공식 만찬주 중 하나였다.


6년 숙성한 40도 ‘솔송주’.
6년 숙성한 40도 ‘솔송주’.
준비한 술은 증류한 40도 솔송주(6년 숙성)였다. 로린츠는 우선 한 모금 마시고 맛을 평가했다. “과일 향과 상큼한 아로마가 느껴지고 입안에 맴도는 느낌이 너무 섬세해서 좋다. 마치 배나무가 우거진 과수원을 조용히 걷는 것 같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드는 술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서양배와 우리 배에 손이 먼저 간다. 그는 깎은 배 위로 시나몬 가루를 뿌리고 함께 으깬다. “시나몬 가루의 스파이시한 향이 잘 어울린 것 같아요.” 유자잼, 레몬주스와 시럽, 파인애플주스도 조금씩 섞는다. 파인애플주스는 시각적인 이유 때문에 넣는다. 거품이 많이 생기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솔송주를 정성스럽게 넣고 흔들기 시작한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격렬하게 흔든다. 마침내 완성된 술에 그가 붙인 이름은 ‘페어 레인’(Pear Lane)이다. 단아한 우리네 선비의 풍미가 잔 안에 넘치고 그 사이로 뿜어 나오는 옅은 달콤함과 시원함은 입술을 잔으로 강렬하게 끌어들인다.

한국 바텐더 손에선, 막걸리와 요구르트 녹아나다


엄도환 바텐더
엄도환 바텐더
에리크 로린츠가 창작을 끝내고 한숨 돌리고 있자 곁에 있던 엄도환 바텐더(오른쪽 사진)가 나선다. 로린츠보다 우리 술에 익숙한 엄도환 바텐더. 그가 만드는 막걸리와 솔송주 칵테일은 외국인이 만든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24살부터 바텐더를 시작한 엄씨는 뚝딱뚝딱, ‘스노맨’(Snow Man)과 ‘폰드’(Pond)를 만들어낸다. ‘스노맨’은 하얀 얼음 나라를 옮겨온 듯하다. 막걸리, 플레인 요구르트, 벌꿀 시럽, 레몬주스, 잘게 부순 얼음이 한데 어우러진 막걸리 칵테일이다. 쪽쪽, 빨대로 마실수록 달콤함이 목젖을 타고 시원하게 식도로 넘어간다. 솔송주 칵테일인 ‘폰드’는 솔송주와 서던 컴포트(혼성주의 일종), 로즈 시럽, 라임주스가 조화를 이룬다. 두가지 모두 여성이나 술에 약한 이들이 즐겁게 마실 수 있는 맛이다. 그는 국내 칵테일 마니아들이 달고 상큼한 맛을 선호하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유럽인들은 단맛이 거의 없는 칵테일을 좋아한다”고 로린츠는 말한다. 그가 만든 칵테일은 엄도환씨의 칵테일보다 단맛이 적다. 두 사람이 만든 두가지 칵테일은 같은 재료지만 완전히 다른 맛이다. 무궁무진한 칵테일의 세계다.

주거니 받거니 칵테일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두 사람의 풍경은 정겹다. 칵테일은 우정도 사랑만큼 키워준다. <7년 만의 외출>의 귀여운 유부남 리처드 아서는 ‘금발미녀’를 위해 마티니에 설탕을 붓고야 말지만 결국 마시지는 않는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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