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를 누르며
192호 〈esc〉가 배달되는 날 저는 남쪽으로 차를 몰고 있을 겁니다. ‘결결이 일어나는 파도/ 파도 소리만 들리는 여기/ 귀로 듣다 못해 앞가슴 열어젖히고/ 부딪혀 보는 바다’(이은상)가 행선지입니다.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입니다.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유치환·김춘수·김상옥, 화가 김형로·전혁림 등의 고향이죠. 떨리는 손으로 써내려간 연서를 들고 우체국으로 향하는 청마의 뒷모습을 목격할 것만 같습니다. 김약국네 다섯 딸의 비극이 그 거리에 펼쳐지고 고향을 그리워만 하다 눈감은 윤이상 선생의 한이 느껴질 것만 같습니다. 벌써부터 예술가들을 키워낸 바닷내음이 코끝을 간질이는 듯합니다. 도다리쑥국, 멸치회, 굴 등에 곁들인 소주 한잔도 빼놓을 수 없겠죠.
이번 호를 만들면서 미리 설레었습니다. 김선우 시인이 남인도 오로빌에서 보내온 편지에는 잔잔한 행복함이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시인은 비로소 이름을 되찾은 듯합니다. 욕심 없이, 분노 없이 여유로운 명상이 넘치는 그곳에서 시인은 ‘나’와 마주하고 ‘나’와 신나게 놀 수 있었나 봅니다. 행복한 시인의 깊은 데서 나오는 즐거운 노래로 더불어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돌아볼 시간도 없이 무작정 질주해온 바로 그 ‘나’로부터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허탈하고 고독하고 목마르고 허기진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요. 먼 데로 떠나야만 ‘나’를 만날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원효대사의 깨달음이 아니어도 결국 마음의 문제가 아닌가요. 지금 여기에서 ‘나’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나’에게 선물해봅시다. 카피라이터 탁정언씨 말마따나, 왜 우리는 남들과는 잘 지내려고 애를 쓰면서 정작 ‘나’ 자신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걸까요? 따스한 봄 기운이 스멀거리는 이때, ‘나’에게 먼저 품을 열어보시죠. 너그럽고 따뜻하게.
김진철 〈esc〉 팀장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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