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를 누르며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책을 통 안 읽게 됐습니다. 스마트폰 탓입니다. 예전 정부과천청사를 출입할 땐 왕복 4시간 출퇴근길에 읽은 소설이 한달 평균 10권은 넘었는데, 이젠 스마트폰으로 이메일과 뉴스 확인하고 트위터 찾아보고 연재만화 챙겨 보다 보면 1시간 출근길은 뚝딱입니다. ‘오늘은 꼭 10~20분에 끝내고 책을 읽으리라’ 다짐하지만 매번 역시나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자주 찾아보는 코너가 있습니다. 인터넷 연재만화를 보다 우연히 찾아 들어간 게시판에는 사람들의 고민이 한가득이었습니다. 주로 여자들, 간간이 남자들이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다른 이들이 다양한 조언과 충고를 댓글로 달고 때론 비난과 독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건 고민입니다. 즐겨 읽는 소설보다 더 소설스러운 일들이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배우자의 외도, 연인과의 이별, 가족 사이의 갈등 따위가 주된 고민거리들이더군요. 뭐니뭐니해도 남녀문제가 가장 주요한 레퍼토리입니다. 인류사에서 늘 반복돼온 뻔한 일들이겠지만 양상은 뭔가 다른 것 같습니다. 일상에 지치고 삶에 찌든 이들의 막장 스토리랄까요. 삶이 행복하지 않은 거겠죠.
알콩달콩 행복에 젖어 있던 아내가 남편에게 뒤통수를 맞았답니다. 아내에게 울며불며 빌고 나서 또다시 옛 여자에게 연애편지를 보냈다는군요. 아내는 치를 떨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이런 생각이란 뭔지 궁금합니다. 아내에게 낯간지러운 사랑을 속삭이면서 또다른 여자에게 안타까운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의 딜레마란 무엇인지. 남편을 증오하면서도, 자존감을 무너뜨려 가면서까지 습관성 바람 증후군에 빠진 남편을 다시 받아들이는 여자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지. 이 부부에게 임경선씨의 상담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속도전의 경쟁 속에서 사랑이란 끝내 도달하지 못할 목표인지도 모릅니다. 밥벌이에, 육아에 시달리며 삶의 본질 따위를 되뇌는 것은 무모한 도전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젊은 그들이 제주도로 몰려가는 것 아닐까요.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떠나기를 꿈꾸는 건 아닐까요.
김진철 〈esc〉 팀장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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