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를 누르며
집 앞길에서 숨을 후욱 들이켰다 뱉어냅니다. 기사 마감 때문에, 혹은 저녁 약속이 늦어져 심야택시에서 내린 참입니다. 자정 넘어 인적 드문 거리엔 나무들만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마침 장마도 지나갔습니다. 바람은 고요히 허공을 오락가락거립니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상쾌한 내음에 가슴이 부풉니다. 삶은 그래도 살만한 것이다, 하고 되뇝니다.
여름밤 시원한 바람을 느껴본 것도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네요. 그 후련한 청량감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그런 기분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헤아리며 걸어봅니다. 조심조심 걷다 보면 저절로 고개를 들기 마련입니다. 검푸른 밤하늘엔 별 몇 떨기 눈을 반짝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들판에 드러누워 쏟아질까 즐거운 두려움 속에 밤새워 지켜보던 그 별무리들이 아직 그렇게 태연히 살아있는 것이겠죠. 별 아래 몸을 누이면 말도 몸짓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광대한 우주가 마음속으로 내려앉고 어리석은 소년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경쾌한 혼돈 속에 전율했습니다.
비가 그치고 따끈따끈한 햇살이 내려앉는데도 간혹 감상에 젖어듭니다. 늦은 밤 원고를 토닥이다가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보니, 아직 철이 덜 들었나 봅니다. 이럴 땐 나만의 심야식당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공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휴가철입니다. 많이들 떠났거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북적이는 도심을 벗어나 황홀한 자연의 빛에 몸을 맡길 때입니다. 떠납시다, 이제.
< esc > 이번호를 만들면서 적잖이 설레었습니다. 허름한 선술집 즐비한 도시를 떠올리며 동시에 초록빛 넘쳐나는 시원의 자연을 그려보는 일에 가슴이 흔들렸습니다. 삼십촉 백열등 깜빡이는 부산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다, 물빛·풀빛 찬란한 홋카이도 대평원을 맨발로 소요하는 공상에 사로잡혔습니다. 느껴보세요, 지금.
김진철 < esc > 팀장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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