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예가체프 진짜 좋던데?” 커피 생두를 찾아 지구촌을 헤집고 다니는 사람들을 취재하고 돌아온 김성환 기자에게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예가체프? 노노, 이르가~체페!” 바로 지적질이 돌아오더군요. 로스팅한 콩을 구입해 직접 갈아 내려 먹은 제 첫 핸드드립 경험의 커피가 ‘예가체프’였습니다. 러시아 아저씨가 만들기라도 했나,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이르가체페는 에티오피아의 지명이었던 겁니다.
나의 예가체프, 아니 이르가체페를 만난 건 지난해였습니다. 한창 어쭙잖은 책을 쓰고 있었습니다. 언론진흥재단의 저술지원을 받고 마감을 지키지 않으면 지원금을 반환해야 했습니다. 집필의 길은 멀고 험한 ‘타는 목마름’의 여정이었죠. 가장 곤란한 건 집필 공간이었고요. 서재는 다섯살짜리 꼬맹이의 침공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웬만한 커피 전문점은 소음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맞춤한 공간을 만나게 됩니다. 오에 겐자부로의 ‘마지막 장편 3부작’이나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에 나오는 작가라도 될 듯한 착각에 빠질 만한 곳이었습니다. 일산에 있는 카페 ‘드레스덴’. ‘독일의 피렌체’라 불리는 드레스덴 못지않은 곳이었습니다. 주말마다 그곳에서 주로 예가체프, 아니 이르가체페나 김성환 기자가 “차가운 걸 원했던” 더치 커피를 맛보며 자판을 두드렸죠. 높다란 지하층은 끽연에도 최상이었습니다. 무사히 책을 마무리했고 예가체프, 아니 이르가체페를 구해 집에서 갈아 내려 마시게 됐습니다.
그랬던 드레스덴이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책쓰기에 좋았지만 손님도 없었던 고즈넉함은 양날의 칼이었던 겁니다. 18세기 7년전쟁 때 프로이센군의 포격으로 파괴되고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손상을 입고 2차대전 땐 궤멸적 피해까지 보고도 유서 깊은 건축물들을 복구해낸 드레스덴이, 이제 사라졌습니다. 내게 예가체프, 아니 이르가체페만 남기고서 말이죠.
김진철 팀장 nowher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