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를 누르며
가을이다 하고 기대하고 나면 꼭 대낮 열기가 한여름을 방불케 하고야 맙니다. 한가위 연휴 마지막날 해님도 ‘나그네 옷 벗기기’ 게임이라도 하는지 공기를 볶아대는군요. 니가 이겼다 하고선 재킷을 벗어던져 버립니다. 반소매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연휴 음주에 젖은 몸을 편집국에 두고 말리고 있습니다.
커버스토리를 읽다 지난해 11월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한겨레> 20기 수습기자 후배들과 함께 한라산을 올랐던 기억입니다. 전날 새벽까지 술 푸고 비행기를 놓칠 뻔했던, 후배들에게 창피했던 얼굴을 돌아봅니다.(그땐 뭐 저런 사람 다 있어? 했겠지만 이제는 아마도! 이해하지 않을까요….) 온통 젖은 채 등산을 마쳤지만, 몸은 뜻밖에 날아다니고 있었고, 그래서 깜짝 놀랐던 겁니다. 그 뒤 술자리에서 esc팀장 인사발령 소식이 날아들었고요. 이런 이야기를 담은 저의 첫 ‘esc를 누르며’에, 당시 김아무개 문화부장은 ‘수습기자 몸 빙의 선언’이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수습기자처럼 살았던가 되돌아보지만, 별생각 떠오르질 않네요. 다만 10개월이 금세 지나가 버린 건 확실합니다. 지루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행위와 존재의 이유가 주어졌던 건 아닐 겁니다. 등반가들에게 물어보세요. 산은 왜 오르나요? 누군가 그랬다죠. 거기 있으니까 오르지요. 삶도 그런 게 아닐까요. 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힘들게 취직에 매달리고, 안달복달하며 살아가는지…. 그렇다고 생이 재미없고 괴롭기만 한 건 아니죠? 시시포스도 끊임없이 굴러떨어지는 돌덩이를, 묵묵히 굴려올리며 고통스러워만 하진 않았을 겁니다. 때로 요령을 터득해 환호했을 테고, 때로 정상에 올라선 뒤 승리의 쾌감을 맛봤을 테고, 때로 금단의 상상 속에 전율했을 테죠…. 음주에 젖은 몸이 덜 마른 탓일까요. 허튼소리가 길어졌습니다. 여하튼 결론! 샤모니든 돌로미테든,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입니다!
김진철 〈esc〉 팀장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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