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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갓 입학한 3월이었을 겁니다. 한 친구가 소매를 잡아끌었습니다. 오늘 시간 있냐? 멋도 모르는 새내기한테 시간은 주체할 수 없는 무엇이었습니다. 왜? 쪽수 좀 채워주라. 뭔 소리야? 오늘 ○○여대랑 미팅인데 한 놈이 결석했다. 별다른 저항 없이 끌려간 곳이, 아마도 서울 돈암동 어디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은 남자들만 득실대는 공대였고 심심찮게 여대들로부터 미팅을 제안하는 편지가 날아왔죠. 아마도 두 대학의 과대표가 이런 중요한 허드렛일에 나섰을 겁니다. 무려 스무명의 남학생들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합니다. 기다란 탁자가 늘어선 미팅 전문 카페에 들어가 앉아 나름의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기다렸을 테죠. 비슷비슷한 여학생들이 잠시 뒤 자리를 잡습니다. 두 과대표는 한바탕 설레발을 치고 나서 작은 쪽지를 돌립니다. 이름하여 학고팅.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는 짝짓기를 할 때도 1지망부터 3지망까지 쓰고 보자는 거였답니다.
대체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치열한 현장이었을까요? 솔직히 그저 그랬습니다. 그래서 써제꼈죠. 1지망은 아, 2지망은 무, 3지망은 나. 아무나와 분식집에서 어색하게 밥을 먹고 어색하게 길을 걷다가 결국 흩어졌던 몇몇 쌍들은 호프집에서 뭉치고야 말았던 것 같아요. 좀 놀던 친구들은, 야 어젠 완전히 동문회 분위기였어, 라고 현장을 묘사하더군요. 여자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는 공대생들은 3~4월 두달간 정말로 줄잡아 40여차례 이런 미팅의 힘겨운 일정들을 묵묵히 이어갔던 것 같습니다.
대개 인간은 시행착오를 거쳐 배운다죠. 당연히 저는 아무나와 밥을 먹은 뒤로 다시는 아, 무, 나에 과감하게 지원하진 않았습니다. 신중하게 접근했죠. 최선이 아니면 차선, 차선이 아니면 차악이라도 골라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뭔가 평가하고 선택하는 행위, 이게 쉬운 일이 아니죠.
대책없이 늘 고민만 했던 건 아닙니다. 아마도 그날은 햇살 찬란한 5월 초가 아니었을까요? 욕심을 비우고 과감하게 한 여학생을 1지망으로 적어넣었습니다. 정말 맹세컨대 아무런 기대도 없었어요. 그런데 웬일입니까. 1지망끼리의 만남이 이뤄졌던 겁니다. 요즘처럼 휴대전화도 없고 몇해 뒤 나온 삐삐도 없던 그 시절, 그 둘은 어떻게 됐을까요?
김진철 팀장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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