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눈이 미친 듯 퍼붓는 밤이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죽어버린 것처럼 무척이나 고요했지만 눈 쏟아지던 풍광은 ‘미친 듯’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요. 어두컴컴한 밤과 미친 듯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헤집고 버스는 내달렸지요. 고요한 소란은 아담한 풍취의 호텔 앞에서 멈춰섰습니다. 일본 후쿠시마의 한 온천호텔이었죠. 다다미가 차려진 호텔방의 하룻밤은 짧고도 짧았습니다. 같은 방을 쓴 기자는 다른 동료들과 지하 온천으로 몰려갔고, 덕분에 사케 한잔 홀짝이며 창밖 눈 내리는 풍경을 조용히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지진과 해일과 원자력발전 사고를 당한 후쿠시마는, 지금 어떤 표정일까요. 너무나 짧았던 하룻밤을 지내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며 무척이나 아쉬웠던 2005년의 그곳 후쿠시마. 우리 한자음으로 읽으면 복도(福島). 복스러운, 복이 많은, 복 받은… 그런 섬이라는 뜻이겠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섬이 아닌데도 섬이라는 지명이 의아했지만, 따지고 보면 후쿠시마는 혼슈섬의 일부니까 섬의 일부인 섬일 텐데요. 후쿠시마에 갔던 까닭은 그곳이 이른바 ‘한류’의 고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곳 시민들의 환대가 지금도 부끄럽게 느껴질 만큼 어마어마했던 기억입니다. 그 사람들의 복된 눈길이 아련합니다. 눈으로 뒤덮인 고요한 소란은 언제쯤 다시 이 눈에 담을 수 있을까요.
눈의 고장인 그곳은 스키 천국이기도 합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 때문에 후쿠시마 등지로 스키여행 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올해는 많이 줄어들 테죠. 일본에서 스키라면 홋카이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비용이 만만치 않겠지만 오타루라도 다녀온다면 나쁘지 않을 텐데요. 영화 <러브레터>가 담아낸 가슴 아픈 설경, 히로코가 눈밭을 헤치며 절규하던 명장면이 만들어진 곳. 올겨울 홋카이도 스키여행이라도 계획해본다면 환상적이겠죠? 하지만 저, 스키 못 탑니다. 스키장은 가봤어도 술잔만 기울이고 왔다는 거.
김진철 팀장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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