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백령도 호박김치·제주도 퍼데기김치…그 섬에 가면 입맛이 돈다
백령도 호박김치·제주도 퍼데기김치…그 섬에 가면 입맛이 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최고의 까나리액젓 가진 백령도에선 간장이 필요 없어
백령면 가을2리 ‘시골칼국수’의 낡은 문을 밀어젖히자 주인 박형화(49)씨가 반갑게 맞는다. “뭐한다고, 이리 먼 데까지 오셨어요. 김치, 뭐 볼 거 있다고.” 부엌에는 절인 배추가 산더미다. 예전 백령도 사람들은 배추를 소금에 절이지 않았다. 귀한 소금을 퍽퍽 배추에 뿌릴 수는 없었다. 추수가 끝나면 볏짚으로 만든 망에 배추를 담아 바닷가로 갔다. 이고 지고 온 망은 짠 바닷물이 밀려드는 바위틈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돌을 얹었다. 10시간이면 바닷물이 아삭한 배추를 쓰다듬고 다독거린다. 바닷물에 절은 배추는 힘없이 축축 늘어지지 않는다. 또다른 도약을 위해 꼿꼿이 등을 세운 육상선수처럼 결이 살아 있다. 바닷물과 만난 배추의 짠맛은 짜되 고소하다. “그렇게 가져와서 집 앞 논두렁 개울물을 깨서 씻어냈지.” 물이 깨끗했던 시절 이야기다.
“자, 배추김치 만들고 나면 남은 거 모아 호박김치를 담급니다.” 요놈이 신기하다. 백령도에만 있는 호박김치다. “옛날에는 호박우거지라고 불렀어.” 김장하고 남은 배추 부스러기, 납작하게 썰어 살짝 소금에 절인 무, 멍든 것처럼 퍼런 시래기들을 한데 불러 모은다. 호박도 듬성듬성 썰어 합친다. “예전에는 호박을 껍질째 넣었지.” 수십년 동안 수백번은 더 버무렸을 주름진 손으로 김씨는 서걱서걱 재료들을 섞는다. “가만 산초가 빠졌네.” 산초는 고춧가루가 전해지기 전에 우리 선조들이 썼던 향신료다. 알싸한 향이 코끝을 때리고 정신이 번쩍 난다. 까나리액젓과 생강, 마늘도 빠지지 않는다. 두 손에 가득 담긴 액젓이 와락 채소들한테 안긴다. “자, 알 가져와라.” 김씨의 주문에 며느리가 쪼르르 부엌 안쪽으로 들어간다. 탱글탱글한 덩어리들이 나온다. 숨을 할딱거리면서 뛰어온 어린아이처럼 붉은, 활활 타기 전에 서서히 피어오르는 모닥불처럼 빨간, 비틀거리면서 어두운 골목을 걷는 술꾼의 달아오른 볼처럼 뻘건 알 한 무더기가 나타났다. “꺽주기 알이야. 맞다. 육지 사람들은 꺽주기라고 하면 모를 거야. 삼식이 알이야.” 삼식이는 쏨뱅이목 삼세기과의 바닷물고기 삼세기를 말한다. 주로 매운탕으로 먹는다. 이름도 다양하다. 포항에서는 수베기, 경기도와 강화도에서는 꺽지, 전라도와 강원도에서는 삼수기, 멍텅구리, 서울이나 태안에서는 꺽쟁이, 경상남도에서는 탱수라고 부른다. 삼식이나 꺽주기는 경기도와 전라도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호박김치 속에서 아드득 터지는 꺽주기 알
백령도 사람들은 늦가을이나 이른 겨울에 삼세기 알을 챙겨뒀다 11월 말이나 12월 초 김장철에 꺼내 쓴다. 삼세기 알은 백령도 호박김치가 다른 지역의 호박김치와 다른 특징이다. 호박지라고도 부르는 충청도 호박김치는 호박, 배추와 무청, 황석어젓, 고춧가루로 만든다.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는 것도 다르다. 한때 백령도는 황해도였다. 짜지도 맵지도 않고 기교도 없는 소박한 황해도 음식의 흔적이 백령도에 남아 있다. 황해도 호박김치에는 산초가 꼭 들어간다. 버무리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1주일 정도 푹 삭혔다가 자박자박 물을 부어 끓여 먹었다. 찌개용 김치인 셈이다. “왜 맛있느냐고? 배추도 무도 지금 맛있고, 꺽주기 알도 지금 맛있고 산초도 맛있으니깐.” 통통 터지는 알 맛이 예사롭지 않다. 대포를 삶아 먹는 것처럼 아드득아드득 소리가 난다.
1. 백령도 호박김치.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켰다가 끓여 먹는다. 2. 제주도 퍼데기김치. 씹을수록 배추의 식감이 살아난다. 3. 섬김치는 바다가 만든다. 백령도 두무진에 있는 호박김치. 4. 호박김치를 버무리는 박형화씨.
바다의 짠내가 아삭아삭 풍미를 자랑하고, 고소한 미각이 숨어 있다 되살아난 것처럼 신선하다. 백령도 배추는 해풍이 키웠다고 했다. 박씨의 집 뒤에는 작은 배추밭이 있다. “올해는 비료도 안 줬어요. 해풍 때문인지 병충해가 없다니까.” 백령도에는 배추농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집집마다 텃밭에 먹을 만큼만 재배한다. 자급자족해야 했던 섬만의 특징이다. 음식은 무릇 맛보는 이가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법! 호박김치를 들고 맛볼 이를 찾아 나섰다. 백령도 하면 또 해병대 현빈이다. 현빈이 근무한다는 63대대로 향했다. 극성스러운 팬이 있을 법도 한데 개미새끼도 없이 조용하다. 초코파이도 잊지 않았다. 군인들의 일용할 양식이다. “면회하러 왔는데요?” 부대 들머리에서 물었다. “어느 중대죠? 중대를 알아야 하는데.” 맞다. 중대를 모른다. 해병대는 중대 행정반에 먼저 연락해서 면회 날짜를 잡아야 한다고 한다. “현빈 잘 있느냐”고 물었다. “혹시 현빈 면회 오셨어요?” 어린 군인은 기가 찬 표정이다. 김치냄새가 솔솔 뒷목을 붙잡는다. 섬 주민들은 백령도에 현빈이 없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에 간 뒤로 섬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불편할지도 모를 ‘진실’은 알 도리가 없다. 배추꽃대, 유채 줄기·잎, 봄동…제주김치는 철마다 변신
남한 최북단의 백령도에서 기수를 남쪽으로 틀었다. 따뜻한 남쪽의 섬 제주도에는 어떤 김치가 있을까? 지난 14일 새벽, 제주도는 온통 관광객으로 벅적였다. 제주시 용담동 김숙자(65)씨는 한창 절인 배추와 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는 제주 토박이다. “예전에 제주는 바닷물에 배추를 절였어.” 백령도도 그렇다. 여기도 배추농장은 없다. 집집마다 마당에 작은 텃밭이 있어서 배추를 기른다. 거름이 유기농이다. 볏짚을 돼지우리에 넣었다가 돼지발에 차여 납작해지면 꺼낸다. 거기다가 보리씨앗을 섞어 삭힌 뒤 외양간에 넣는다. 그러면 소발에 차인 거름이 만들어진다. 오줌도 귀했다. “거름으로 쓸 오줌을 그냥 누면 할머니한테 혼났어.” 제주도 사람들은 날씨가 따스해서 오래 보관하는 김장김치보다는 바로바로 만들어 먹던 김치를 담갔다.
김씨가 질긴 배추 잎들을 가져온다. 퍼데기김치(퍼데기짐치) 재료다. 퍼데기배추는 요즘 개량배추와 달리 집 울타리나 노지에서 저 혼자 자란 독립적인 배추다. 요즘 배추보다 질기고 색도 더 짙다. 멸치, 다시마, 양파로 한껏 우린 물에 고춧가루를 넣어 반죽한다. 제주도 멸치액젓이 맛을 낸다. 살살 바르면 완성. “이제 남삐짐치(위 사진) 만들자.” 남삐짐치는 무김치다. 멸치액젓, 고춧가루, 마늘, 생강이 양념이다. “예전에 무는 손으로 그냥 껍질을 깎아 먹었지.” 김씨는 고추를 채 썰고 빻는다. 가루가 아니라 굵은 고추 조각이 튀어나온다. 예전 방식이란다. 제주향토음식연구가 김지순씨는 “제주도는 고춧가루가 귀해서 김치에 적게 썼고 제주 흙으로 빚은 독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제주도에는 이른 봄에 솟은 봄동으로 담근 김치, 꽃피기 전에 연한 유채 줄기와 잎으로 담근 유채김치, 동지김치가 있었다. 겨울을 넘긴 배추는 봄에 꽃대가 올라온다. 동지나물이라고 불렀다. 동지나물이 꽃피기 전 어린줄기와 잎으로 담근 김치가 동지김치다. “밥이나 먹고 가.” 김씨가 잡아끈다. 식탁에는 아시아 열대지방이 원산지인 생강과의 양하로 만든 장아찌가 나왔다. 퍼데기김치가 씹을수록 배추 잎의 싱그러운 식감이 살아나듯 양하장아찌도 맛볼수록 상큼함이 피어올랐다. 제주도에는 장선우 감독이 산다. 김치를 싸들고 배우 현빈 대신 감독 장선우를 만나러 나서본다. 백령도·제주도=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요리 박형화, 김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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