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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처럼 올라봐

등록 2012-09-26 17:03수정 2012-09-26 17:05

반트길 첫 마디 끝에서 바라본 인수봉 동면 의대길과 영길 등반.
반트길 첫 마디 끝에서 바라본 인수봉 동면 의대길과 영길 등반.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손이 부들부들, 다리가 후들후들 임종업 기자의 인수봉 암벽 도전기

“모두 벌초하러 갔나? 오늘은 한산하군!” 22일 오전 10시 반 동면 거대암반인 대슬래브 끄트머리끝. 인수봉 등정을 위해 모인 일행 중 한 명이 바윗길을 살피며 말했다. 벌써 뒷목이 뻣뻣해오고 입속이 바작바작 탔다. 15~16년 전 어느 날 하강 길에서의 추락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바위와 인연을 끊은 이 내 몸을 저 바위가 다시 붙여줄 것인가.

오늘 오를 길은 반트와 산천지 사이의 패시길. 이 길은 1983년 바위꾼 곽효균씨가 개척한 여러 개의 길 가운데 하나다. 크랙(틈)과 페이스(급경사)가 적당히 혼합된 난이도 5.9~5.10의 중급. 첫째 마디 20m, 둘째 마디 22m, 셋째 마디 35m, 넷째 마디 32m, 다섯째 마디 30m. 모두 합쳐 139m, 통상 2시간 걸린다는 거리다. 평지라면 25초 이내에 끊을 수 있는 단거리.

15년 전 하강길 추락 경험 뒤
기사 위해 재도전
몸 따로 마음 따로

가장 앞에 오르는 선등은 한국산악회 안나푸르나 최병기(42) 이사. 키르기스스탄 악수산군, 보스톤피크(4810m), 가셔브룸4를 등반한, 암벽등반 22년의 베테랑으로 한국산악회 산악연수원 과정장(책임자)이다. 라스트는 연수원 부원장을 겸한 슈퍼아이스코리아 조남복(57) 시이오. 역시 등반경력 20년이 넘는 산꾼이다. 내가 세컨드. 인수봉을 오른 적이 있다고 뻥을 쳤어도 베테랑 두 사람이 나를 샌드위치처럼 싸안고 올라칠 전략이다.

대슬래브에서 몸을 풀면서 하소연했다. “돌아온 탕자를 받아주는 셈 치고 나를 받아들여 달라.” 출발점은 대슬래브 위쪽 오아시스. 바위가 돌멩이가 되고 그것이 부스러져 흙으로 쌓인 곳에 몇 그루 소나무가 자란다. 아래쪽에서 볼만한 경치였던 봉우리가 금세 쏟아져 내릴 듯이 험상궂은 바위로 변했다. 사진촬영을 위해 박미향 기자가 일반 등산화 차림으로 끌려 올라와 패시길 테라스에서 카메라를 정조준하고 있다.

크랙이 직상하는 첫 피치. 손끝 발끝으로 겨우 비비적거리며 오른다. 중간 확보지점(안전띠의 줄을 걸 수 있는 곳) 직전, 두 줄기 크랙이 좁아지며 바위가 불뚝 일어섰다. 오른쪽, 왼쪽 손끝을 벌려 크랙 양쪽에 끼우고 오른쪽 발끝을 크랙에 비벼넣은 뒤 ‘끙’ 하고 페이스를 끌어안았다. 실금에 걸친 왼쪽 손끝이 아우성을 쳤다. 지상에서 분명 몇 초에 불과했을 시간이 여기서는 무한대로 늘어졌다. 손가락 안쪽 인대가 늘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왼발을 옮길 차례. 발끝을 끼우기에는 크랙이 좁았다. 삐죽삐죽 땀이 솟았다. 암벽화 속의 발가락이 비명을 질렀다. 시간은 흐르고 왼쪽 손끝이 힘을 잃었다. 슬립! 선등은 도대체 어떻게 올랐을까? 거미처럼 쑥쑥 올라간 베테랑의 스텝을 읽어내기에 내 길눈이 어두웠다. 안 되겠다 싶은지 선등은 완력으로 끌어올렸다. 쌍볼트에서 휴식하는 동안 기사를 위한 사진을 찍었다. 군중 앞에 벌거벗은 기분이 이럴까.

뛰면 25초 거리
암벽으로 2시간 걸려
겁없어야 즐길 수 있어

둘째 피치. 잘려나간 바위가 남긴 단면이 초승달 모양으로 걸렸다. 반트길은 볼트에 사다리를 걸어 넘어가고 패시길은 오른쪽, 바위가 흐르다 20~30㎝에서 멈추며 형성된 크랙으로 통한다. 문제는 오버행(거꾸로 선 바위)인데다 120도 정도로 쩍 벌어져 비빌 데가 없는 것. 선등은 프렌드(크랙에 끼우는 인공확보물)를 몇 개 치고 구렁이 담 넘듯이 훌쩍 사라졌다. 갑자기 미아가 된 느낌. 퀵드로(카라비너 두개를 끈으로 연결한 안전장비)에 연결된 리본에 오른발을 걸쳤다. 딛고 일어서면서 왼발을 끌어올려 맞은편 바위를 밀어야 하는데 키에 비해 불어난 몸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흘러내렸다. 바위 앞에서 치르는 혹독한 신체검사다. 30대에 그런대로 균형 잡혔던 몸은 20여년 입맛 따라 먹은 음식이 쌓여 군살이 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 동안 뼈마디를 잇는 근육들은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자네! 그동안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야? 바위의 물음은 준엄했다. “올라붙여!”라고 내 몸에 명령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런 무대포는 지상에서나 통할 터. 손발은 “뭐 그런 명령이 다 있느냐”며 저항했다. 내 몸의 정보전달 시스템은 무너졌고 사지는 제멋대로 놀았다. 너희들 두고 보자. 이제 와 질책한들 무슨 소용인가. 두번째 시도도 실패.

선등은 로프를 통해 전해진 나의 딱한 사정을 시시콜콜 알고 있을 터. 궤도를 한참 벗어난 몸은 한 수 접어둔다 쳐도 크랙에서는 재밍(크랙에 손과 발을 넣어 몸무게를 지지하는 기술)도 스탠스(바위에 서는 자세)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젬병인 것을. 추락을 무릅쓰고 한땀한땀 오른 자신의 자세를 읽고 흉내낼 줄도 모르는 청맹과니인 것을. 오랜 휴식 끝에 한차례 재교육만을 받고 인수봉을 오르겠다는 고집불통인 것을. 아니다. 나는 젬병도, 청맹과니도, 고집불통도 아닌 70㎏짜리 짐짝에 불과했다. 이튿날 연수원 교육장에서 최 과정장은 그 사실을 폭로했다. 짐짝도 낯이 있지, 부끄러웠다.

셋째 마디는 자분자분 트래버스(옆으로 건너가기). 넷째 마디는 길게 뜯고 올라가는 크랙. 다섯째 마디는 등산화로 갈아신고 걸어 올라가서 참기름 바위와 만난다. 동면의 길들이 수렴하면서 만나는 병목. 수많은 발길로 닳고 닳아 미끄럽대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 유일하게 맞닥뜨린 구면이다.

이윽고 정상. 평소라면 붐빌 ‘고인돌’ 그늘이 한산하다. 헬멧과 신발을 벗고 주저앉아 맹물에 김밥을 넘긴다. 혀는 달다는데 머릿속은 모래 씹는 맛이다.

하강 뒤 선등과의 대화. “지켜보니 어떻던가?” “암벽등반은 자신감 있고 겁이 없어야 하며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동문서답이다. 하루 뒤, 20년 묵은 암벽화처럼 너덜거리는 몸이 대신 말했다. “제발, 좀, 잘 살지 그래?”

글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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