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기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왕조시대의 영화를 한껏 과시하는 궁전들을 보면 ‘와~’ ‘와~’ 찬탄을 하다가 마지막에 나오는 말은 이겁니다. “이러니까 망하지.” 현지인들에게는 비아냥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도대체 이렇게 많은 고급 장식물을 모으고, 이렇게 화려한 건물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쥐어짜고 인력을 동원했을까 하는 생각이 이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 최대의 샹들리에,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등을 자랑하는 터키 이스탄불의 궁전을 갔을 때도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간다면 나오는 길에 똑같은 감상평이 나오겠지요.
비단 멀리 유럽의 왕조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139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이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비가 올 때마다 애물단지가 되어버리고 결국 송사까지 휘말린 세빛둥둥섬만 봐도 저러다 망한 거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친 현시욕으로 망하는 건 권력만이 아닙니다. 왕정의 머슴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다 죽어간 이들의 가족도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고, 한강 르네상스, 즉 한강 주변의 아파트값 폭등을 기대하며 여의도나 강남에 집을 샀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엄청나게 하락한 집값과 대출금 탓에 “망했다”는 곡소리가 나옵니다.
이뿐만이 아니죠. 지금 바로 이 시간에도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의 교체를 앞두고 ‘이러다 망한다’며 불안초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타고난 계급과 운명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왕정시대도 아닌 민주주의 사회에서 망하고 흥하는 게 남 탓만은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 몰라라 한 다음에 망했다 한탄한들 들어줄 사람 없습니다.
김은형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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