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이 남자들의 책상에 생리대가 쌓인 이유

등록 2013-02-13 20:55

‘후아’ 생리대 포장 시안
‘후아’ 생리대 포장 시안
[매거진 esc] 스타일
천편일률적
생리대 디자인에
아름다운 일러스트
녹여넣은 남성 디자이너들

생리대 브랜드 이야기를 담은 소책자.
생리대 브랜드 이야기를 담은 소책자.
대형마트에 가면 남성들은 발을 들이지 않는 코너가 있다. 바로 여성용품을 진열해 놓은 곳이다. 즐비한 생리대 제품 사이를 기웃거리는 사람은 여성뿐이다. 이곳을 간혹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다. “이제, 생리대 파는 곳을 한번쯤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디자인스튜디오 텍스트(TEXT)에서 일하는 남성 디자이너 한정훈 팀장의 말이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텍스트의 한 팀장과 정진열 실장은 2011년 여름 이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 세계는 바로 생리대의 세계이다. “한국암웨이에서 국내 중소기업과 만드는 생리대 제품 ‘후아’(HUA)가 있어요. 이 제품의 포장 디자인을 맡게 됐죠. 저흰 본래 제품 포장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았어요. 상업적인 포장 디자인은 처음이었죠. 게다가 생리대라니, 처음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척 고민이 많았어요.” 정 실장은 생리대와의 첫 만남을 그렇게 떠올렸다.

생리대 포장 디자인. 일단 진열대를 떠올려보자. 대부분 하얀 바탕에 옅은 초록색이나 파란색, 분홍색 무늬가 대부분이다. ‘나 여기 있소!’라고 외치는 디자인은 없다. 게다가 생리대의 운명이란, 검은 비닐봉투 안에 담겨 고스란히 수납장 어딘가로 직행해 화장실에서 끝난다. 때문에 텍스트의 생리대 포장 디자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얀 바탕이라는 전통은 고수했다. 그러나 그 외의 전통은 철저하게 파괴하려 했다.

그럼에도 기존 생리대에 대한 이해는 필수였다. 처음 ‘생리대’라는 단어를 내뱉자마자, 한정훈 팀장은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생리대, 정말 아무것도 몰랐죠. 어떤 재질로 만드는지, 생리대에 무슨 스티커가 붙어 있는지도 몰랐어요. 제품 전체의 포장과 함께 생리대 하나하나에도 포장 디자인이 들어가게 되잖아요. 처음에는 책상에 생리대를 무더기로 쌓아놓았던 적도 있었죠.” 정진열 실장은 “이걸 정말 착용이라도 해봐야 하는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멜 깁슨이 여성의 생각을 읽는 <왓 위민 원트>라는 영화 속 설정이 계속 떠오르더라고요” 하며 한 팀장의 말을 거들었다.

생리대 포장 디자인에는 대부분 소재나 기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깨끗해요’라는 광고는 수년 동안 소비자의 뇌리에 박혀 있다. 포장 디자인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큰 변화가 없다. 텍스트의 남성 디자이너들은 ‘이 제품을 쓰면 깨끗하다’는 어법을 벗어나고 싶었다.

텍스트에서 디자인한 실제 제품.
텍스트에서 디자인한 실제 제품.
브랜드 이미지를 정리하고 다듬은 김덕민 팀장은 말했다. “생리대 포장 디자인의 주제는 깨끗하다거나 활동이 편하다거나 하는 제품 중심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거의 예외 없죠. 결국 상품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저희는 이 제품을 쓰는 사람들을 포장 디자인과 브랜드 이미지에 녹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 남성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직접 제품을 쓰는 여성으로서도 생소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제품만 이야기할 뿐 그것을 쓰는 일반 여성들의 삶은 녹아 있지 않다는 부분에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래서 기존 제품의 탐구와 함께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작업도 병행했다. 정진열 실장은 “여성들의 소비, 문화에 대한 개념을 알기 위한 작업들을 많이 했죠. 그 과정을 통해서 보면 여성에게 문화는 어떤 것을 향유하거나 소비해서 풍요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으로 귀결되더라고요. 이런 결론을 디자인으로 풀어내 본 것이죠”라고 설명했다.

여성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을 조사하기 위해 모아놓은 자료들.
여성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을 조사하기 위해 모아놓은 자료들.
생리대에 대한 여성들의 좀더 구체적인 요구를 조사하면서 의외의 디자인 포인트도 얻었다. 시각적인 요소가 주된 포장 디자인이다. 하지만 생리대 포장 디자인에는 ‘오감’을 고려해야 한다고 김 팀장은 깨달았다. “여성 소비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소리’더라고요. 화장실에서 사용할 때 포장이나 스티커를 뜯으면서 나는 소리를 많이 신경쓰시더라고요.” 그래서 제품 하나를 감싸는 포장재를 코팅이 되지 않은 소재를 썼다. 실제로 만져본 이 소재는 훨씬 부드러운 질감으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들이 디자인한 생리대 포장 디자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러스트’이다. 흔히 보던 꽃무늬나 나뭇잎 무늬는 없다. 도심 속 멋진 여성들의 삶의 단면을 포착한 그림이 인쇄되어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는 데이비드 다운턴이다.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작가이다. 한 팀장은 그와 전자우편을 주고받으며 작업을 진행했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어서 저희 쪽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요청하는 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포장 디자인에 녹여야 하는 주제가 있었기 때문에 10번이 넘는 전자우편을 주고받으면서 저희가 바라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었어요.”

난관은 여기서 그친 게 아니다. 생리대 포장재는 종이가 아닌 비닐 소재이다. 종이 인쇄 경험만 많았던 텍스트의 디자이너들에게는 크나큰 복병이었다. 정 실장은 “색과 선이 분명한 일러스트를 넣다 보니, 만드는 쪽에서도 겁을 많이 내더라고요. 인쇄 공정상의 우려뿐 아니라 선명한 세가지 색과 그림을 쓴 파격적인 시도를 했을 때 소비자들의 반응은 어떨 것인가도 많이 걱정됐죠.”

“여성의 필수품인데도
취향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지요.
쑥스럽지만 요새도
주변에 물으며 모니터링해요”

독특한 생리대 포장 시안.
독특한 생리대 포장 시안.

지난가을 첫선을 보인 이 제품은 상품화되어 팔리고 있다. 좀더 과감한 시도를 하려고 했지만, 작품이 아닌 상품인 점을 고려해 절충했다. 한정훈 팀장은 “원래는 좀더 원색적인 바탕색을 써볼까 했어요. 좀더 파격적인 시도를 해보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분명히 쉬운 일은 아닌 듯싶다. 재미있는 생리대 포장 디자인을 찾아봤지만, 시안만 있을 뿐 상품화한 경우는 없다.

생리대 포장 디자인이라는 첫 도전은 그들에게 첫 상품 디자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의미도 있다. 정진열 실장은 말했다. “요즘은 양말 하나에도 디자인을 이야기하죠. 그런데 왜 여성과 가장 밀접한 부분에서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고려나 디자인이 동떨어져 있었을까요? 생리대는 취향과 동떨어진 제품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 ‘밀접’하다는 뜻에 가장 가까운 필수품 가운데 하나이다. 김덕민 팀장은 “생리대를 그저 제품으로 볼 것이냐 여성 삶의 요소를 볼 것이냐 사이에서 후자의 측면을 확장해 브랜드 이미지에 녹이고자 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작은 디자인이 결국 우리 삶의 차원을 조금씩 높여간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적인 여성용품 디자인에서 벗어난 생리대 포장 디자인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정 실장은 “일상적인 삶과 가까운 디자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생리대 포장 디자인, 어떤 면에서 보면 전혀 ‘표’가 안 나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이런 디자인이 선택의 여지를 넓히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요? 이게 바로 디자인의 힘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면에서 생리대 포장 디자인에 그림이 들어가 있지 않은, 글귀가 담겨 있는 부분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들이다. 한 팀장은 “글자 크기를 많이 조정하고, 최대한 단순하게 구성했다. 이것저것 다 넣기보다는 덜어내려는 노력을 많이 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정 실장은 작은 디자인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덧붙였다. “공공디자인은 국외에서 쓰지 않는 말입니다. 국내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돈을 들인 것에는 ‘공공디자인’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의미는 무의미하죠. 버스 안내도나 시간표처럼 이해하기 쉽고 명확한 디자인의 미덕은 상업디자인에서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남성 디자이너들의 공공적이면서 상업적인 생리대 포장 디자인 고군분투기는 실제 상품이 나오면서 막을 내렸다. 이들의 얼굴사진은 당사자들의 요청으로 찍지 않았다. 하지만 쭈뼛쭈볏 주변 사람들에게 아직도 질문을 건넨다. 여성 소비자들의 반응을 조사하기 위해서다. 일단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단다. 이들의 또다른 작은 디자인이 궁금해진다.

글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사진제공 TEXT

<한겨레 인기기사>

이동흡 헌재소장 후보자 전격 사퇴
적게 쓰면 돈 더내라? 황당 전기요금 개편안
탐나는도다 쏘맥자격증
‘브라자 공장’에 간 남자 “E, F컵 너무 커서…”
날벼락 맞은 레슬링 “희망은 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