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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수’ 김대리를 향한 은밀한 반격

등록 2013-08-07 20:53수정 2013-08-09 17:19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30대 직장인 싱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일본 만화가 마스다 미리의 ‘수짱 시리즈’ 중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봄)의 한 에피소드. 일본 만화 저작권의 이유로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을 수 있게 편집했으며 가운데 한 페이지는 지면상 생략했다.
[esc] 커버스토리 직장 내 ‘사소한 괴롭힘’ 문제 대처법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대놓고 분란을 일으키는 건 아니지만 은근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소리 높이자니 옹졸해지는 것 같고 가만히 있으면 발바닥 티눈처럼 성가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규직, 비정규직, 시간제 아르바이트, 낙하산, 공채, 경력직, 찌질이, 뺀질이, 아부쟁이, 무개념, 무싹수, 왕재수, 미꾸라지, 여자 상사, 남자 부하, 먼저 승진한 후배 부장, 사사건건 명령을 무시하는 선배 부하직원…. 복잡한 ‘성분’을 가진 사람들이 비빔밥처럼 뒤섞여 한데 일하면서도 나름대로 위계를 갖춘 직장에서는 아무리 처세의 달인이라고 해도 늘 성공하거나 승리할 수만은 없다. 게다가 직장에서 ‘은근히 신경 쓰이는 싫은 사람’이라도 생기면 위산역류, 속쓰림, 신트림은 피할 수 없는 직업병, 산업재해가 된다. 이렇게 좋아하기 힘든 사람과는 대놓고 싸우기도 힘들다. 마땅히 대응할 방법도 없는 현실에 속병이 생기고 열불만 내게 된다.

이처럼 복잡해진 직장 내 인간관계를 반영이라도 하듯, 요즘 사소한 일상의 불편함을 담아낸 직장 이야기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 <직장의 신>(KBS), 일본 만화 <아무래도 싫은 사람­수짱 시리즈>, 국내 웹툰 <미생>, 그리고 케이블채널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tvN)까지 직장 내 인간 군상의 다양함과 페이소스가 가득 담긴 관계의 괴로움을 보여주는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온다.

소심한 복수를
은밀하게 꿈꾸는 것
뒷담화를 하는 것은
저항의 일종이자
연민의 길로 가는 첫단계다

지난달 국내에 발간된 일본 만화가 마스다 미리의 ‘수짱 시리즈’ 가운데 2편인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봄)은 한·일 직장인 싱글 여성들한테 공감을 얻으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조리사 자격증을 갖고 홀로 원룸형 아파트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30대 독신 여성 수짱은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처럼 화려하지도, 잘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에게 어느 날 직장에서 ‘좋아할 수 없는 사람, 그렇다기보다 불편한 사람, 그게 아니라 싫은 사람’이 생긴다. 한마디로 싹수(싸가지) 없는 무카이씨는 사장의 조카로 낙하산 입사한 뒤 사사건건 카페 점장인 수짱의 속을 긁어놓는다. 수짱이 정색이라도 할라치면 돌아서서 웃으며 “농담이야” 하고 말해, 화내는 사람을 일순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신공’을 지닌 인물이다. 수짱은 미묘한 신경전을 하면서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고 감정노동을 하게 되면서 결국 직장을 옮긴다. 수짱은 “정말로 나를 괴롭히는 건 그런 식의 말을 듣는 것보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라며 괴로워한다. 출판사 이봄 고미영 대표는 “3편 격인 <수짱의 연애>를 보면, 어린이집 조리사로 직장을 옮겨 일하는 수짱이 ‘전 직장에서 반은 도망치듯 나왔다’고 말하자, 원장 부인인 미도리 선생이 ‘도망쳤다가 아니라 그만뒀다, 단지 그뿐인 거야’라고 대답하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그걸 본 많은 독자들이 후련했다는 소감을 전해왔다”고 말했다. 직장 내 사소하고 불편한 인간관계가 싫어 ‘도망친’ 비슷한 처지의 독자들에게 ‘단지 그 일을 그만둔 것뿐’이라고 정리해준 미도리 선생의 말은 큰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웹툰 <미생>
한국 웹툰 <미생>
얼마 전 시즌 1이 끝난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 또한 매번 복잡한 관계의 늪으로 빠져드는 직장인들의 일상을 그렸다. 직장인의 사춘기, 직장 내 정치 같은 복잡한 비즈니스맨들의 세계를 깊숙이 다루고 있는 이 작품에서 사장의 낙하산으로 들어온 고졸 비정규직인 장그래는 애매한 신분과 처지 탓에 일상적으로 인간관계나 대화의 어려움을 겪는다. 동기들의 입사 1년 기념 회식 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떠다니던 그는 역량을 인정받지만 결국 2년 뒤 회사에서 계약 만료로 나오게 된다. 정규직 직원인 동기들도 각자 사정은 있다. 1등으로 입사하고도 바로 그 실력 때문에 잘난 척 으스댄다며 상사에게 비난받는 안영이도 소주로 쓰린 속을 달래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최근 시즌 12를 시작한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영애씨의 직장은 좀더 리얼한 곳으로 그려진다. 새 직장인 ‘낙원 종합인쇄소’로 자리를 옮긴 경력직 영애씨는 회사에 오자마자 10년 넘게 그곳에서 붙박이로 지내는 라미란 과장한테 괴롭힘을 당한다. 그는 커피숍에서 얻어온 생리대 하나를 선심 쓰듯 줬다가, 수틀리면 그걸 다시 내놓으라며 돌변하는 ‘시간 돌아이’다. 사사건건 텃세를 부리며 허드렛일을 시키고, 자기가 해야 할 야근까지 남몰래 시킨다. 밤새 영애씨가 해놓은 일을 가로채기하고 공을 자기가 움켜쥐는 반면, 불리한 일은 쏙 빠져나가는 ‘미꾸라지 상사’의 전형인데다 사장에게 온갖 아부로 일관해서 영애씨의 월급까지 빼앗는 사악한 ‘뺀질이형’이기도 하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 영애씨의 현실이다.

티브이엔(tvN) <막돼먹은 영애씨>의 한 장면
티브이엔(tvN) <막돼먹은 영애씨>의 한 장면
이번 시즌 연출을 맡은 한상재 피디는 “여성 직장인들이 많아지면서 이제 본격적인 여자 상사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고, 술 한잔 하면서 풀 수 있는 남자 상사보다 여자 상사가 더 힘들다는 사람도 주변에 많다. 이번 시즌에서 초심으로 돌아가 직장인의 모습을 더 리얼하게 그리기 위해 이런 설정을 했는데 영애씨가 들어가자마자 상사에게 들이대고 때려치울 순 없어서 아직까지는 참고 순응하는 중이지만 곧 상사에게 들이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대 상황에 따라 인간관계의 양상이나 대응법도 달라지고 있다. 직접적 갈등에서 좀더 간접적이거나 눈에 띄지 않도록 바뀌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9년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 75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진상 상사’의 부당한 대우나 명령에 63.2%가 ‘그냥 참는다’고 답했다. ‘직접 문제제기한다’는 답도 25%에 이르렀다. 그러나 요즘 직장인들은 무조건 참거나 돌직구를 날리지 않는다. 참기에는 억울하지만 돌직구를 날리면 더 피곤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은 소심하면서도 은밀한 반격을 꿈꾸게 한다.

지난 6월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5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46%가 직장에서 상사에게 ‘은밀하고 위대한 복수를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가장 많은 사람이 통쾌한 복수로 꼽은 것은 ‘상사 말 못 들은 척 무시하기’(30.8%)였다. 2위는 ‘상사의 지시가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못 들은 척하기’(24.3%), 3위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사를 칭찬하는 척 단점 꼬집기’(21.5%)가 올랐다. 그밖에 ‘은밀한 복수’로 △회식 때 상사 개인카드 긁도록 분위기 유도하기 △중요한 말 전하지 않기 △인사 안 하기 △다른 동료를 내 편 만들고 은따(은근한 왕따) 시키기 △회식 끝나고 모범택시에 태워 보내기 △이물질 섞인 음료 주기 △회식 때 술 취한 척 골탕 먹이기 △책상 위 중요 메모 몰래 버리기 등 자잘한 복수법도 있었다. 하지만 복수를 한 뒤 50.2%의 직장인은 ‘통쾌하다’고 답했지만 28.1%는 ‘오히려 불이익을 받을까 노심초사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런 대응을 눈치챈 상사들도 불이익을 직접 주기는 힘들다. 저항인지 반발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같이 화를 내봤자 본인만 우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평론가 이택광 교수(경희대)는 “직장 내 인간관계가 굉장히 복잡하면서 중요해졌는데, 이는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언제든지 사람을 해고할 준비가 돼 있고 다수의 비정규직을 허용하는 금융자본주의의 특징”이라고 진단했다. 이교수는 “과거에는 상사나 동료에게 문제가 있어도 ‘내 일’만 잘하면 됐는데 지금은 고용구조가 불안해지면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내가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가장 결정적으로 상사에게 어떻게 잘 보이느냐, 인간관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오게 된다. 자기평가나 상향평가, 하향평가 같은 업무평가도 일에 대한 효율성을 높이려고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되면서 직장인은 각자 ‘자기 규율’을 만들게 된다”고 말했다.

복잡해진 직장 내 인간관계는 통상적인 갑을 관계가 아닌 다양한 근무조건과 경험, 나이, 성별을 가진 이들이 비슷한 공간 안에서 비슷한 종류의 일을 하면서 경쟁하는 환경을 만든다. 선배가 먼저 승진하고 후배가 뒤따르는 산수 같은 위계도 사라진 지 오래다. 남자 상사뿐 아니라 여자 상사가 등장하고 성별, 나이, 학력, 경력이 복잡하게 교차한다. 고민하는 사람만 찌질하게 만들어버리는 골치 아픈 인간관계는 자기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지라는 말뿐인 무한자유 시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놓은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미묘하게 더 험해진 정글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의 탓도, 나의 탓도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첫번째다. 같이 물에 빠져 머리채 잡고 버둥거리기를 그만두고, ‘죽기밖에 더하겠느냐’는 마음으로 대범하게 온몸의 힘을 쭉 빼는 수밖에 없다. 소심한 복수를 은밀하게 꿈꾸는 것, 뒷담화를 하는 것은 저항의 일종이며 관대한 연민의 길로 들어서는 첫 단계일 뿐이니 괴로워하지 말지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이봄 제공(<아무래도 싫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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