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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스커트·판탈롱으로 세상을 뒤흔든 한국의 코코 샤넬

등록 2013-10-16 20:44수정 2013-10-17 15:20

대한민국 패션계의 문을 연 디자이너 노라노(왼쪽)씨와 영화 <노라노>를 연출한 김성희 감독이 작품 옆에서 자세를 취했다. 올해 85살의 노라노 디자이너는 속눈썹을 붙이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대한민국 패션계의 문을 연 디자이너 노라노(왼쪽)씨와 영화 <노라노>를 연출한 김성희 감독이 작품 옆에서 자세를 취했다. 올해 85살의 노라노 디자이너는 속눈썹을 붙이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esc] 스타일

60년 디자이너 인생 담은 다큐멘터리 ‘노라노’의 주인공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와 김성희 감독 대담
“나는 옷을 통해 여성의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

‘한국의 샤넬’이라고 일컬어지는 패션디자이너 노라노(본명 노명자·85)의 말이다. 1947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우리나라 첫 유학파 패션디자이너다. 1956년 우리나라 첫 패션쇼를 열었고 1963년 첫 디자이너 기성복을 생산했다. 1970년부터 73년까지 파리 프레타포르테 패션쇼에 참가했고 1974년 뉴욕에서 첫 한국 디자이너 패션쇼를 여는 등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1960~70년대 미국판 <보그>에 벌써 그의 옷이 등장했으며 1970년대 뉴욕 유명 백화점엔 그의 코너가 마련돼 있었다.

그는 1960년대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와 펄시스터즈의 판탈롱을 입혀 두가지 스타일을 대유행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편 그의 옷은 근대 신여성 혐오담론의 매개가 돼 ‘미니에 속지 말자’, ‘여성 증오의 소산’, ‘변태 디자이너들의 노리갯감’이라는 보수언론의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영화 <맨발의 청춘>(1964)에서 배우 엄앵란씨는 노라노의 옷을 입어 돌풍을 일으켰다.
영화 <맨발의 청춘>(1964)에서 배우 엄앵란씨는 노라노의 옷을 입어 돌풍을 일으켰다.

지난해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씨는 “사람들이 소니아 리켈, 코코 샤넬은 얘기하면서 내 나라 디자이너는 돌아보지 않고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이 너무나 말이 안됐고 슬펐다”며 노라노 패션 60년 기념 전시회 ‘라 비 앙 로즈’를 기획했다.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그가 만든 400여벌의 옷을 고객들에게 기증받아 그 가운데 일부를 전시했다.

전시회 기획 과정을 따라가며 노라노라는 디자이너의 삶 속에서 한국 근현대 여성문화사를 그려낸 다큐멘터리 영화가 바로 <노라노>다. 이 영화가 오는 31일 개봉한다. 여성주의 미디어공동체 ‘연분홍치마’가 제작하고,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감독인 김일란씨가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며, 김성희(38) 감독이 연출했다. 여성들에 의한,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의 영화인 셈이다.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 청담동 노라노 부티크에서 김 감독과 노 디자이너를 만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노 디자이너는 젊은이들 못지않게 꼿꼿한 자세로 허리를 펴고, 속눈썹을 붙인 채 카리스마 가득 찬 모습으로 실내에 들어섰다. 카메라 앞에선 전문모델 같은 표정과 자세를 자연스럽게 취했다.

노라노의 기성복 스케치.
노라노의 기성복 스케치.

김성희(이하 김) 4년 전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어서 처음 만났다. 패션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선생님의 삶은 개인사뿐 아니라 한국의 대중문화사이자 여성사이기도 해서 크게 매력을 느꼈다. 젊은 사람들한테 삶을 들려주는 것은 선생님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노라노(이하 노) 처음엔 반대했다. 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건 옷을 벗고 나가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조카가 “어차피 죽고 나면 누군가 할 작업인데, 살아 있을 때 하는 게 낫다”며 설득했다. 내가 젊은 사람들한테는 워낙 마음이 약하다. 무엇보다 감독·피디와 스태프들의 순수와 열정에 감동을 받아 이런 사람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 출연을 결심했다.

1970년대 미국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 쇼윈도. 노라노의 옷이 진열돼 있다.
1970년대 미국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 쇼윈도. 노라노의 옷이 진열돼 있다.

좋은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배우 최은희 선생님과 노 선생님 두 분이 쳐다보며 웃는 장면이었다. 선생님은 어떠신지?

최은희 선생님이 나와서 “우리가 젊었을 땐 열과 열이 부딪쳐서 일했다”고 했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 (노라노 디자이너는 1955년 신상옥 감독의 <꿈>과 1959년 <춘희> 의상을 맡았다.) 윤복희씨도 스스로에 대한 다짐처럼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파고 들어가고 파고 들어가고 해야 한다. 선생님이 그렇게 한다”고 했는데 그 부분이 좋더라. 엄앵란씨는 그의 할머니가 “영화 의상 때문에 인기가 올라가고 톱스타 된 줄 알아라” 했다는데 그 얘기도 재미있었다.

선생님 인생 가운데 두 장면을 재연했는데, 둘 다 디자이너의 당당함과 철학이 반영된 중요한 에피소드였다. 19살 때 한 이혼은 선생님 인생의 분기점이자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정상’이 아닌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선택의 순간이었다. 그 장면이 던져주는 메시지가 컸다.

지금도 뚜렷하게 이혼을 결심한 그때의 감정이 그대로 기억나는데, 갈림길이라는 게….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은 두 갈래였다. 시집살이를 하는 건 뻔히 보이고, 새로운 길은 미지수이고….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지의 길에 희망이 있지 않나. 그럼 희망 쪽으로 가야지.

또 하나의 재연 장면은 5·16 때 군부에 끌려가 취조실에서 담배를 꺼내 무는 장면이었는데 당당한 선생님의 캐릭터가 정말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여자 혼자 살아가야 하는 험한 세계의 긴장감이 있었다.

사실 그 시대에 담배와 맥주 모델 제의가 왔는데 거절했다. 요즘 같았으면 했다.(웃음) 가만 보니 요정 마담 몇명 입에서 내 이름이 자주 거론돼 내가 거물인 줄 알고 형사들이 데려간 모양인데, 겁을 먹진 않았다. 그때는 일할 때 줄담배를 피웠고, 나는 죄도 없고 잘못될 것도 없으니 당당하게 담배를 꺼냈다. 그랬더니 젊은 형사가 얼른 뛰어와 불을 붙여줘서 나도 깜짝 놀랐다.

지난해 노라노 패션 60년을 맞아 제작한 스카프. 미국판 <보그>, <바자>에 실린 옷들과 수출 대표작, 베스트셀러들을 스케치해 프린트했다.
지난해 노라노 패션 60년을 맞아 제작한 스카프. 미국판 <보그>, <바자>에 실린 옷들과 수출 대표작, 베스트셀러들을 스케치해 프린트했다.

‘노라노’ 하면 잘사는 일부 계층이 입었던 옷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영화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건데, 디자이너로서 기성복을 처음 만든 사람이라는 의미가 크다. 대중에게 저렴하고 적합한 옷을 입혀 패션철학을 대중화한 것이다. 또 하나는 선생님이 미니스커트와 판탈롱 유행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대중의 욕망을 읽어내는 게 빨랐다. 그냥 디자이너로서 외국 유행을 가져다 퍼뜨리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사람들과 호흡하며 입맛에 맞게 재해석하며 견인한 문화기획자이자 코디네이터였다는 점이다.

윤복희는 미니스커트, 펄시스터즈는 판탈롱을 입혔다. 요즘 <결혼의 여신>에서 배우 윤소정도 내 옷을 입는데 예쁘더라. 또 내가 크게 유행시킨 게 ‘홈드레스’다. 집에서 여자들이 전부 속바지를 입고 있던데 뭘 다른 걸 입혀야겠다고 해서 가장 싼 옷감을 누벼 집에서 막 빨아 입을 수 있는 점퍼스커트를 만들었다. 더 재밌는 건, 남편들이 예쁜 옷 고맙다고 인사를 전해온 거다.(웃음) 유행은 흐르지만, 패션에서 ‘작품’이 되는 건 오래 지나도 꾸준히 사람들이 찾으며 진가를 발휘하는 옷이다.

선생님을 4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나는 ‘이것 언제 끝나나’ 하면서 살았다.(웃음) 그런데 선생님은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길을 지키고 최선을 다했다. 영화에도 “선생님은 도망치고 싶은 순간에도 도망치지 않고 살았다”는 말이 나온다. 그 말이 좋다. 선생님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른들은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을 많이 못 보는데, 노 선생님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그 연세에도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홉 남매 가운데 차녀였다. 유복하게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식구들 거느리고 살려면 일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나는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인생이 중요했다. 디자이너라서 화려하고 근사한 줄 알지만 사실은 중노동이다. 지금도 검정 옷만 입는데, 블랙은 자주독립을 상징한다.(웃음) 사실은 아침에 바빠서 옷이며 구두며 가방이며 색깔 맞출 시간이 없으니 주로 입게 되는 거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시계처럼 일한다.

예전 선생님이 주로 활동하던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척박한 환경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1950~60년대 패션이라는 것은 지금처럼 거부감 없는 일상문화가 아니라 사치고, 여자들의 쓸데없는 소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옷으로 여성에게 자유로운 움직임과 자존심을 부여했다. 요즘 영화 홍보를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나는데, 디자이너들이 우리 기록과 역사에 무관심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시사회 때 나이 든 여성 관객들은 선생님이 활동할 당시 ‘노라’가 나오는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많이 얘기했다.

어렸을 때 나는 문학소녀로 ‘이와나미 문고’ 같은 책을 많이 읽었다. 10대 때 처음 영어로 읽은 책이 <인형의 집>이었다. 가정을 깨고 나온 노라가 그때는 신여성의 대표 격이랄까, 한창 센세이셔널했다. 이혼은 사회나 부모도 다 반대하고, 고립되는 거였다. 내가 시작할 땐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쫓겨나고 갈 데도 능력도 없던 때였지만 용기와 믿음이 중요했다. 0에서 시작한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성공을 못한다.

이번 영화에서는 출연진, 전시회 스태프, 영화 스태프 등 모두가 여성이다. 이 영화는 ‘여자들의 영화’였으면 좋겠다. 시사회를 몇번 하는 동안 20대에서 70대까지 여성들이 각자 연령에 맞게 다 다른 울림을 갖고 가더라. 세대가 다르지만 우리 여자들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독립영화의 환경이 너무 나빠졌고, ‘여성 영화’라고 하면 어느새 고리타분한 영화라고 인식되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는 여성들에게 자신감과 자부심을 주는 영화였으면 한다. 5060 아줌마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객운동, 새로운 치맛바람이 일었으면 좋겠다.

난 대체 왜 젊은 친구들이 내 스토리에다 돈을 투자해서 만드는지, 망하면 어떡하나, 안 해도 될 걱정을 하고 있다. 영화가 재밌다고? 그럼 다행이다. 관객이 많이 들어야 할 텐데….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연분홍치마·시네마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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