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옛 애인의 선물을 전시하는 <네버렛미고>전에 기증된 물품들. 10월25일 기준으로 60여점이 모였다.
[esc] 옛 사랑의 선물 전시회 ‘네버 렛 미 고’
사랑은 떠나도 물건은 남는다. 함께 찍었던 사진과 말라버린 꽃다발, 주고받은 선물들.
서랍 어딘가를 차지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점유하는 추억과 이별하고자 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사랑은 떠나도 물건은 남는다. 함께 찍었던 사진과 말라버린 꽃다발, 주고받은 선물들.
서랍 어딘가를 차지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점유하는 추억과 이별하고자 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갖가지 종류의 하트가 한데 모였다. “애기야 사랑해”라고 쓰인 하트 벽걸이, 하트 쿠션, 하트 목걸이. 하트 모양의 빨간 초들은 언젠가는 불을 밝히고 누군가의 사랑을 전했으리라. 그런데 이 하트들은 지금은 주인이 없다. 헤어진 옛 애인이 남긴 선물을 모아 전시하는 <네버 렛 미 고>전에 나온 물건들이다.
전시를 준비하는 고재욱 작가는 페이스북으로 전시 소식을 알리고, 기증받은 물건을 서울 사당동 작업실 한편에 차곡차곡 쌓고 있다. 옛 애인의 선물이 가득한 그 방은 인생 무상, 연애 무상을 증거하는 박물관이다. 말라버린 꽃다발, 둘이 함께 여행 간 나라의 출입국 카드며 심지어 함께 갚아나가던 대출금 상환 통장도 있다. 우리 영원히 함께하자던 약속이 깨지는 순간, 빛나는 사랑의 전리품들은 초라한 퇴물이 됐다. 선물의 옛 주인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연애를 했을까. 11월20일부터 29일까지 서울 홍대앞 서교실험센터에서 열릴 전시에 앞서 고재욱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 기증자의 사연을 들어보았다.
사랑을 몇가지로 유형화할 수야 있겠지만 모든 사랑은 개별성 속에서 빛난다. 30대 후반의 시각예술가 유영주씨는 이 전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뜸 2가지를 떠올렸단다. “하나는 홍대 클럽 디제이에게 받은 음악 시디고요, 다른 하나는 다른 남자에게 받은 목걸이예요.” 맥락은 달랐다. 2000년 4월7일에 녹음했다고 쓰여 있는 이 시디는 디제이를 하던 남자친구가, 영주씨가 좋다고 하는 음악만 골라 직접 만들어준 것이다. 어이없이 헤어졌지만 디제이가 홍대앞 클럽문화의 꽃이었던 시절의 기념품과도 같은 거라서 쉽게 버리질 못했다. 다른 하나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속이고 접근했던 애인이 준 목걸이다. “처음에 받았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속으로 ‘얘는 내 스타일 정말 모르는구나’ 했죠. 우리 관계 같아요. 돌이켜보면 그 사람은 나라는 사람이 아닌 사랑 자체가 필요했던 사람이죠.” 물건을 쉽사리 버리지 못했던 영주씨는 전시 소식을 듣자마자 ‘기회는 이때다’ 싶었단다. 시디는 누군가가 가져가서 계속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포장하고, 목걸이는 내 인생에 다신 재수없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침 뱉어서 보냈단다. 고 작가는 “<네버렛미고>에 기증한 옛 애인의 선물은 전시가 끝난 뒤 일일이 기증자에게 의사를 물어 버리거나, 되돌려주거나, 서로 교환하게 된다”며 “기증자들이 전시를 통해 연애의 추억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돕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김성희(가명·36)씨는 전시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보냈다. 그에겐 환희와 고통의 상징인 목걸이다. 6년 전 여름, 영국에 있는 남자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하던 그는 런던으로 날아갔다. 남자친구는 그에게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하면서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성희씨도 좋다고 답했다. 그때가 12시, 황홀한 점심시간이었다. 그러나 2시간 뒤, 남자친구의 비밀을 알게 된 그들은 크게 싸웠단다. 이틀 뒤 서울로 돌아온 성희씨는 이별 절차에 들어갔다. “청혼 목걸이를 받은 날이 이별한 날이 됐어요. 이 목걸이는 제게 상처로 남아 있어요. 수년 동안 볼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지금은 무덤덤한 사랑의 화석 같은 존재예요. 전시한 뒤 돌려받으려고 해요. 그래도 잠시 떠나보내면 제가 더욱더 담담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전시장에서 다른 모습으로 보면 어떨까 싶기도 해요.”
책 <행복은 좋은 이별 후에 온다>에선 “이별 앞에서 무기력해질 때는 냉장고와 책상 서랍을 정리해보라”고 충고한다. “미련 때문에 버리지 못했던 것들이 담긴 냉장고와 서랍은 우리 마음과 닮아 있기 때문”이란다. 옛 애인에 대한 감정만큼이나 처리하기 곤란한 물건들을 떠나보내면서 기증자들은 이제야 말로 ‘완전한 이별’을 해보자고 각오했다. 김상훈(가명·33)씨는 “일상적으로는 잊고 있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이 물건이 눈에 띄면 기억이 촉발된다. 달콤한 기억만 있으면 좋겠지만 원하지 않는 기억도 있어서 영원히 치우고 싶었다”고 했다. 상훈씨가 잊고 싶은 기억은 자신과 맞지 않았던 예전 여자친구와 있었던 일이다. “그 친구가 화장품을 선물했는데 써보니까 제 피부에 안 맞더라고요. 그런데 말을 못했어요. 우리 관계도 항상 그랬죠.” 상훈씨는 전시에 버리지도 못하고 갖고 있기도 부담스러웠던 화장품을 내놓았다. 정수빈(가명·27)씨는 군번줄을 내놓았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친구가 자기의 분신이라며 선물한 것이라 헤어진 뒤에도 쉽사리 버리질 못했다. 수빈씨는 “그렇다고 계속 갖고 있는 것도 이젠 의미가 없다”고 단호히 말하면서도 “실은 그 남자친구가 너무나 잘해줘서 그 뒤 모든 연애의 기준이 되었다. 헤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고 털어놓았다.
프러포즈로 받았던 목걸이
함께 탔던 비행기표 등
털지못했던 연애의 유물들을 모아
‘완벽한 이별’을 위한 전시회를 연다 팟캐스트 ‘순정마초, 남자를 말해주마’ 진행자인 박영진씨는 “요즘은 이별도 연애도 속도가 빠르다”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이해보다는 내가 가진 환상을 충족할 수 있느냐가 연애를 지속하는 연료가 되었다. 헤어지자마자 숨가쁘게 다른 상대를 찾고, 깊은 연애로 가지 못하고 짧은 연애를 반복하는 것이 요즘 연애의 트렌드라면 트렌드”라고 했다. 그런데 길게는 10년까지 묵혔던 미련을 터는 사람들은 요즘 트렌드와는 거리가 먼 셈이다. ‘쿨’하지 못한 마음으로 옛 애인의 선물을 보낸 사람들은 많았다. 기증품을 살펴보니 옛 애인이 보낸 청첩장도 있었다. 옛 애인의 마지막 선물이 된 셈이다. 어떤 기증자는 남자친구 머리카락을 보내며 전시가 끝나면 없애달라고 당부했단다. 남자친구가 잡지에 나온 사진을 주고 대신 태워달라고 부탁한 기증자도 있었다. 전시를 기획한 고재욱 작가 자신도 3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받은 물건을 내놓았다. 처음 사귄 계기가 된 음료수 캔에다가 같이 작업했던 흔적들도 있고, 작업실 한쪽엔 고 작가가 그린 옛 여자친구의 커다란 초상이 떡하니 걸려 있었다. “제가 이별 뒤에 그 친구를 잊지 못하고 심각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거든요. 장롱 안쪽에 그 친구가 준 선물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이사를 가면서 물건을 꺼내보니 그새 감정이 사그라졌다는 것을 느꼈어요. 이런 전시를 하면 그 친구에게까지 소문이 전해지겠죠. 제게는 어찌 보면 찌질한 복수 방법이고, ‘이제 난 아무렇지도 않아’ 시위하는 것이기도 해요. 정말 쿨한 사람들은 이미 다 버렸겠죠. 갖고 있다가 전시에 대여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 떠나보내지 못했다는 뜻이에요.” 이것은 쿨해 보이지만 쿨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옛 애인이 남긴 선물은 고재욱 작가의 페이스북(http://www.facebook.com/jaewook.koh)을 통해 기증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소셜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에서도 후원자를 모집하고 있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헤어진 옛 애인의 선물을 전시하는 <네버렛미고>전에 기증된 물품들. 10월25일 기준으로 60여점이 모였다.
함께 탔던 비행기표 등
털지못했던 연애의 유물들을 모아
‘완벽한 이별’을 위한 전시회를 연다 팟캐스트 ‘순정마초, 남자를 말해주마’ 진행자인 박영진씨는 “요즘은 이별도 연애도 속도가 빠르다”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이해보다는 내가 가진 환상을 충족할 수 있느냐가 연애를 지속하는 연료가 되었다. 헤어지자마자 숨가쁘게 다른 상대를 찾고, 깊은 연애로 가지 못하고 짧은 연애를 반복하는 것이 요즘 연애의 트렌드라면 트렌드”라고 했다. 그런데 길게는 10년까지 묵혔던 미련을 터는 사람들은 요즘 트렌드와는 거리가 먼 셈이다. ‘쿨’하지 못한 마음으로 옛 애인의 선물을 보낸 사람들은 많았다. 기증품을 살펴보니 옛 애인이 보낸 청첩장도 있었다. 옛 애인의 마지막 선물이 된 셈이다. 어떤 기증자는 남자친구 머리카락을 보내며 전시가 끝나면 없애달라고 당부했단다. 남자친구가 잡지에 나온 사진을 주고 대신 태워달라고 부탁한 기증자도 있었다. 전시를 기획한 고재욱 작가 자신도 3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받은 물건을 내놓았다. 처음 사귄 계기가 된 음료수 캔에다가 같이 작업했던 흔적들도 있고, 작업실 한쪽엔 고 작가가 그린 옛 여자친구의 커다란 초상이 떡하니 걸려 있었다. “제가 이별 뒤에 그 친구를 잊지 못하고 심각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거든요. 장롱 안쪽에 그 친구가 준 선물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이사를 가면서 물건을 꺼내보니 그새 감정이 사그라졌다는 것을 느꼈어요. 이런 전시를 하면 그 친구에게까지 소문이 전해지겠죠. 제게는 어찌 보면 찌질한 복수 방법이고, ‘이제 난 아무렇지도 않아’ 시위하는 것이기도 해요. 정말 쿨한 사람들은 이미 다 버렸겠죠. 갖고 있다가 전시에 대여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 떠나보내지 못했다는 뜻이에요.” 이것은 쿨해 보이지만 쿨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옛 애인이 남긴 선물은 고재욱 작가의 페이스북(http://www.facebook.com/jaewook.koh)을 통해 기증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소셜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에서도 후원자를 모집하고 있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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