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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베낀다고 가치까지 베껴올 수는 없죠”

등록 2014-07-02 19:19수정 2014-07-03 13:40

‘이새’ 사간점 콘셉트숍에서 만난 디자이너 심상보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이상한 옷이 아닌, 예쁘고 새로운 옷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대기업 브랜드부터 동대문 시장까지 ‘까는’ 에너지는 패션을 향한 뜨거운 애정에서 비롯된다.
‘이새’ 사간점 콘셉트숍에서 만난 디자이너 심상보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이상한 옷이 아닌, 예쁘고 새로운 옷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대기업 브랜드부터 동대문 시장까지 ‘까는’ 에너지는 패션을 향한 뜨거운 애정에서 비롯된다.
[매거진 esc] 스타일
대기업 브랜드에서 동대문시장까지 한국 패션계에 돌직구 날린 디자이너 심상보 인터뷰
“루이뷔통을 똑같이 베꼈다가 잡혀서 감옥 간 사람은 당당한 도둑놈이고, 살짝 베껴서 걸리지 않은 놈은 더럽고 비열한 놈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옷장사를 하는 많은 사람들은 비열하다.” “(옷을) 오늘 기획해서 내일모레 매장에 내놓을 수는 없다. 그런데 동대문에서는 가능하다. 이유는 이미 출시된 아이템을 그대로 카피해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갤럭시 말고 아이폰을, 빈폴 말고 폴로를, 이마트 말고 월마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디자이너가 필요하다.”

‘센 책’이 나왔다. <‘못난’ 한국패션을 까다>(포이즌 펴냄)는 컬러 패션 화보 한 장 없이 오롯이 패션계를 ‘까는’ 데 집중한 디자이너 에세이다. 밑바탕에는 ‘미칠 듯이 옷이 좋다’는 한 남자의 패션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깔려 있다. 1992년 데뷔 직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주목받으며 최고로 ‘핫’하게 떠올랐던 디자이너 심상보(47)가 모교인 건국대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만 매진했던 2009년부터 섬유·패션 전문지인 <틴(TIN)뉴스>에 쓴 칼럼들을 모은 책이다.

지난달 25일 오후 그를 만나러 가는 길. 약속 장소는 서울 종로구 삼청로 초입에 자리한 친환경 패션 브랜드 ‘이새’ 사간점 콘셉트숍. 그는 지난 4월, 5년의 공백을 깨고 이 브랜드에 디자인 총괄이사로 합류했다. 자연 염색과 한산모시의 가치를 알리는 옷부터 꼼꼼한 박음질의 생활용품까지 전시되어 있는 단아한 3층 건물은 헐렁하고 보드라운 흰색 셔츠를 입고 똑바로 자른 앞머리만큼이나 천진한 미소를 짓는 그와 잘 어울렸다.

“업계를 떠나서 대학에서 공부하고 강의하며 지내고 있는데 친분이 있던 패션전문지 대표가 한국 패션의 문제점에 대한 칼럼을 써보라고 권했어요. 말해봤자 소용없는 얘기라고 한숨 쉬니 ‘답도 없는 얘기를 던지는 것도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반해 쓰기 시작했죠. 아무렇게나 쓰라는 말에 정말 마음 가는 대로 쓴 글들입니다.”

대기업 디자인실에는
‘오리지널 디자인’이라
불리는 상품들이 있어요
해외 출장에서 구매해온 것인데
‘해외출장 간다’는 말은
‘해외에 카피할 상품을
구매하러 간다’는 뜻이죠

책에 실린 60편의 칼럼은 제목만 봐도 ‘세다’. 서울시와 패션업계 사이의 갈등 속에서 서울패션위크가 휘청거릴 때 쓴 글이 ‘한국에 빙신 같은 패션인들은 한방에 훅 간다’다. 정욱준 디자이너를 영입한 제일모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담은 ‘제일모직이 LVMH(루이뷔통과 모에에네시 사가 합병해 창립한 회사)가 되는 수밖에’, 아웃도어의 열풍을 바탕으로 본 ‘클래식이 없는 우리나라’ 등 표현을 에두르지 않았다.

그는 대학 재학 중에 중앙디자인콘테스트에 입상한 뒤 디자이너 이상봉의 부티크에서 일하다가 자신의 브랜드 ‘피리 인터내셔널’을 만들었다. 무작정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가 프레타포르테에서 주목을 받았고 베이직어패럴, 루츠캐나다, 피오루치 등에서 상품기획실장으로도 일했다. 화려한 경력에 대해서도 그는 “자기 브랜드를 만든 신진 디자이너가 기업에 들어가서 일할 때 이유는 대부분 돈 때문”이라고 일축했다.

촉망받던 신진 디자이너였던 시절, 자신의 브랜드를 꾸려나갈 수 없는 현실은 가혹하기만 했다. “프랑스에서는 한국에서 온 낯선 디자이너에게도 작품을 본 뒤 주문을 넣는 유명 편집숍들을 마주쳤어요. 하지만 국내에서 자기 옷 팔 곳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죠. 조금 잘나가면 대기업이 브랜드 자체를 인수해버리고요. 이후에는 대기업이 매출 중심으로만 브랜드를 바라보니 성장이 안 될 수밖에요.”

그가 만든 ‘피리 인터내셔널’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패션 기업에 인수됐다. 오랜 시간 그는 ‘내 브랜드’와 ‘기업이 만든 브랜드’ 사이에서, ‘만들고 싶은 옷’과 ‘팔리는 옷’ 사이에서 늘 고민해야 했다고 한다. 브랜드 철학이나 디자인의 가치 등은 모두 무시한 채 ‘오리지널’ 흉내만 낸 옷이라면 그 옷은 동대문에 있든 백화점에 있든 ‘2류’에 불과하다. ‘팔리는 옷’을 찾아 자꾸만 ‘2류’만 만들어내다 보니 한국 패션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국내 패션업계를 향한 그의 쓴소리에는 날이 서 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옷은 단연 ‘베낀 옷’이다. “전세계 누가 보아도 무엇을 카피했는지 알 수 있는 제품으로 자기가 오리지널이라고 우기는 모습이 너무 창피합니다. 우리나라 대기업 디자인실에는 ‘오리지널 디자인’이라 불리는 상품들이 있어요. 보통 해외 출장에서 구매해 온 것인데 결국 ‘해외출장 간다’는 말은 ‘해외에 나가서 카피할 다른 브랜드 상품을 구매하러 간다’는 뜻이죠. 진짜와 가짜 루이뷔통 구분법을 안다고 해서 그 브랜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죠. 그 브랜드가 만들어질 때까지의 가치, 만든 이가 전달하고 싶어하는 메시지가 배어 있는 옷, 브랜드에 대한 존경 등 그 자체가 중요한 건데…. 그런 부분까지 베낄 수 있다고 보는 걸까요?”

좋은 옷은? “예쁜 옷이죠!” 그가 생각하는 좋은 옷의 조건은 두 가지다. ‘예쁘다’와 ‘새롭다’. 어떤 옷이 예쁜가? 어떤 옷이 새롭고 가치있는가? 패션업계에서 여러가지 경험을 쌓고 난 뒤 겸임교수 자리를 얻어 모교로 돌아갔을 때 그는 고민했다. 지난 2월 패션마케팅 전공 석사학위 논문으로 이 문제를 연구했다. 논문 제목은 ‘패션제품의 디자인 호감도와 가치’다. “품질이 유사한 패션제품이 다른 가격으로 팔리는 이유는 디자인 때문이다. 디자인이 좋은 패션제품은 그렇지 못한 패션제품보다 높은 가격으로 인정받고 많이 팔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논문의 한 대목이다. 그는 작은 실험을 통해 패션 디자인에 대한 미적 판단은 나름의 보편성이 있으며 측정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했다.

제자들에게 그는 늘 “아무도 믿지 말고 자신만 믿고 가라”고 조언해준다고 한다. 그는 2년 전 학생들과 의류 브랜드인 ‘플랜식스’를 론칭했다. “학생들이 정말 열정적으로 디자인을 하고 옷을 만들어 홍콩, 프랑스 등에서 좋은 성과를 거뒀어요.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이들을 위한 지원을 해주지 않습니다. 다들 신인 디자이너를 이용할 생각뿐이죠.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돈만 보고 가지 말라고 이야기하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자신의 허리띠와 매장에 진열된 컵받침을 보여줬다. “이 단순한 웨빙벨트 하나도 기본에 충실하게 만든 브랜드가 있는가 하면 대충 모양만 비슷하게 만든 브랜드들이 있어요. 컵받침을 보세요. 박음질 간격이 정말 좁죠? 국내에 이렇게 재봉 일 잘하시는 분들이 아직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주 높은 역량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어제에 발딛고 오늘에 서서 내일을 바라볼 줄 아는 디자이너”를 지향한다. “전통 소재와 천연 염색 등에서 미래의 가치를 본다”는 그는 앞으로 ‘이새’를 통해 디자인 철학을 펼칠 계획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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