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너, 로션, 향수, 핸드크림, 비비크림, 아이크림, 구강청결제, 치실, 헤어왁스…. 서른두살의 회사원 박승현씨가 꺼내놓은 까만색 파우치에서 화장품이 줄줄이 나왔다. “생존 차원이라고 할까요? 집과 회사의 거리가 멀어서 새벽 6시 전에 집을 나서요. 교통체증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일찍 나와 운동을 하기로 한 거죠. 그러다 보니 파우치가 제게 꼭 필요하게 됐죠.”
2~3년 전까지만 해도 남자가 쓰는 화장품이라고는 스킨, 로션밖에 몰랐던 그다. “남자도 자신을 가꿔야 한다는 잡지 기사를 읽고 그때부터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직업상 거래처 사람을 자주 만나야 하는데 화장품을 사용해보니 피부톤도 정리가 되고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더라고요. 이제는 제품별 선호 브랜드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됐습니다.”
토너, 로션, 수분 앰풀 등 기초 제품은 피부 전문 브랜드인 씨앤피(CNP)차앤박 화장품, 비비크림은 남성 전문 화장품 브랜드 ‘디티아르티’(DTRT), 핸드크림은 ‘줄리크’, 구강청결제는 리스테린, 왁스는 ‘백스터 오브 캘리포니아’를 선택했다. 파우치 안의 향수 케이스는 톰포드, 혹시 몰라 시세이도 아이크림도 챙겨 다닌다. 각 화장품의 장점을 묻자 깨알 같은 설명이 이어진다.
“남성 화장품이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요? 최근에 화장품 브랜드들이 남성 제품을 확대하고 남성 전문 브랜드도 제법 생겨서 제품력이 확 좋아졌어요. 비비크림만 해도 예전에는 남성이 쓰기에 텍스처가 자연스럽지 않아 화장했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는데 제가 쓰는 ‘비비 겟레디’는 확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피부를 정돈해줘요. 자외선 차단까지 해주고요. 또 제가 쓰는 왁스는 다른 제품보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을 갖고 있어요.”
패션과 미용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남성들인 ‘그루밍(grooming)족’이 늘어나면서 ‘남자의 파우치’란 말도 더이상 어색하지 않은 조합이 되고 있다. 자신만의 화장품 가방을 꺼내 치장을 하는 모습은 더이상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브랜드도 제품도 다양해지면서 남성들이 적극적인 화장품 구매층으로 떠오르고 있다. 비오템 옴므 ‘유브이(UV) 디펜스’의 경우 전세계 판매량의 70%가 한국에서 팔린다. 뷰티숍인 올리브영은 남성 화장품 매출이 지난해 대비 42% 증가했다고 밝혔다.
“따로 파우치를 챙기기가 어색해 화장품을 그냥 가방에 넣었다가 우산, 이어폰, 자동차키, 지갑 등과 뒤엉켜서 다 흘러나오고 파손된 적도 있어요. 화장품 파우치를 따로 챙기니 가방 안이 한층 정돈되고 깔끔하게 제품을 쓸 수 있더라고요.” 홍보기획자인 박진호(30)씨는 군대 전역 뒤 화장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군대에서 피부가 상했거든요. 요즘은 출근할 때는 물론 주말에 외출할 때도 파우치를 꼭 챙겨요.”
오후쯤 되면 번들거리는 피부를 진정시켜줄 기름종이, 손 씻고 나면 바를 핸드크림, 자외선차단제 정도를 챙기는 것이 시작이었다. 요즘엔 파우치 안에 기초 라인 올인원 제품과 비비크림, 아이크림, 클렌징 폼까지 들어 있다. “기름종이는 파우더를 통해 더 보송보송한 느낌을 주는 ‘가스비 파우더 오일 클리어 페이퍼’가 좋고요, 비비크림은 안티에이징 기능까지 있는 ‘비욘드 타임리스 셀리뉴 비비’를 쓰죠. 스킨·로션·에센스·크림의 기능이 하나로 합쳐진 ‘엑스티엠(XTM) 스타일옴므 멀티플레이어 올인원을 매일 쓰고 잦은 야근으로 피곤한 날에는 ‘불독 오리지널 아이롤온’을 눈가에 발라요.”
모델 출신인 조성만(34) 한림연예예술고등학교 패션모델학과장은 21살 때부터 모델 생활을 시작하며 화장품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진한 무대 화장을 잘 지우기 위해 맥 클렌징 티슈와 클렌징 오일을 갖고 다녔는데 점차 스킨, 로션에서 토너, 세럼, 수분크림까지 하나씩 좋은 제품을 발견하고 쓰다 보니 파우치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가 화장품을 구매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우선 온라인으로 살 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기능성 브랜드인 르뮤나 카스마라 등을 정식으로 수입하는 사이트를 접속해 구매한다. 오프라인에서는 남성 전용 브랜드를 다양하게 갖추고 있는 멀티숍이나 백화점에 주로 가는 편이다. 최근에는 남성 전용 제품 코너를 잘 갖춘 뷰티숍도 자주 이용한다고 한다.
화장 표시 안 나면서
잡티 가리는 비비 인기
립밤, 핸드크림 등
피부관리 관심도 부쩍
이렇게 파우치를 챙기는 남성들이 늘어나면서 밸런타인데이와 졸업식이 있는 2월, 화장품은 남자를 위한 선물로도 떠오르고 있다. 올리브영은 2월 한달간 ‘남자의 파우치를 완성하라’는 주제로 판매 행사를 진행한다. 이미 매장에 남성 화장품 존을 따로 꾸미고 독자적인 남성 전용 화장품 브랜드도 개발했던 올리브영이다. 임예원 씨제이올리브네트웍스 올리브영부문 홍보담당은 “외모를 관리하려는 남성들이 늘어감에 따라 남성 전용 눈썹 정리기, 다리털 숱 제거 면도기 등 특화된 콘셉트의 아이템을 선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남성 화장품 트렌드는 ‘더 간편하게, 더 섬세하게, 덜 강하게’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더 간편하게’. 남성 기초 라인의 강자는 스킨·로션·크림 등의 기능이 하나로 합쳐진 ‘올인원 제품’이다. 박희정 엘지생활건강 홍보팀 과장은 “편의성과 비용의 장점으로 남성 브랜드 ‘보닌’의 올인원 화장품의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33% 이상 신장했다”고 밝혔다. 랩시리즈도 피부 진정, 수분 공급, 주름 개선, 피지 조절 등을 기능을 합친 ‘프로 엘에스 올인원 페이스 트리트먼트’를 인기 제품으로 꼽았다.
올리브영 남성 코너에서 화장품을 고르는 남성들.(사진 올리브영 제공)
‘더 섬세하게’. 남성 전용 제품의 거친 질감이 여성 제품처럼 한층 부드러운 입자로 변모했다. 랩시리즈의 ‘비비 틴티드 모이스처라이저’, 라네즈 옴므의 ‘쿨 비비’, 루나 포맨의 ‘스테이지마스터 시시크림’, 슈에무라의 ‘워터 글로 비비’ 등은 모두 ‘화장한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바르는 즉시 피부 결점을 가려주고 피부톤을 고르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향은 ‘덜 강해’졌다. 아무리 멋진 남자라도 ‘목욕탕 스킨’ 냄새와 함께 매력은 날아가는 법. 최근 나온 제품들은 은은하면서도 여성용 제품과 구별되는 향 개발에 중점을 둔다. 여기에 남성 전용 향수와 미스트, 뿌리는 선크림 등이 더해져 남성 제품은 한층 향기로워지고 있다. 조성만씨는 “최근 남성 전용 화장품들은 향도 자극적이지 않고, 바른 듯 안 바른 듯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베이스 메이크업 제품들도 많아서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아직까지는 ‘파우치 든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신경쓰일 때도 있다고 한다. 박진호씨는 “남성의 외모 관리가 여성스럽다는 편견 대신, 깔끔하고 호감 가는 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기 위한 자기 관리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머니에, 가방에 립밤·핸드크림 등을 쑤셔넣고 다녔다면 한번 ‘남자의 파우치’를 챙겨보면 어떨까.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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