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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이 노래한다…내 나이가 어때서

등록 2015-09-09 19:41수정 2015-09-10 15:29

평균연령 60대인 연주나라 색아들(색소폰을 사랑하는 아마추어들) 연주단이 색소폰 합주를 하고 있다.
평균연령 60대인 연주나라 색아들(색소폰을 사랑하는 아마추어들) 연주단이 색소폰 합주를 하고 있다.
[매거진 esc] 라이프
중장년층 접어들어 색소폰 배우기에 도전하는 아마추어 동호인들의 세계
지난 3일 저녁 경기도 성남시 한국지역난방공사 분당지사 입구. 보안이 철저한 이곳에 들어가려 하니 경비요원이 막아섰다. “어디 가십니까?” “색소폰 불러 왔어요.” 경비요원은 가지고 있던 명단을 확인하고는 들여보내 주었다. 차를 주차하고 계단을 한참 올랐다. 철문을 여니 꽤 널찍한 공간에 의자들이 주욱 놓여 있었다. 두어 사람이 이미 도착해 색소폰을 만지거나 불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얼굴에 파인 주름살이 활짝 펴질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이런 인사는 사람들이 속속 들어올 때마다 이어졌다. 그들 모두는 등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 그 안에는 어김없이 황금빛 색소폰이 들어 있었다.

이날은 ‘연주나라’의 색소폰 앙상블 ‘색아들’이 정기연습을 하는 날이다. 연주나라는 원래 음악출판사다. 피아노, 관악기 등의 교재를 만들고 교육도 하는데, 언젠가부터 아마추어 색소폰 연주자들이 모이는 동호회의 성격도 띠게 됐다. 색소폰 전문 사이트 ‘색소폰나라’와 함께 동호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 색아들은 ‘색소폰을 사랑하는 아마추어들’의 줄임말이다. 41살부터 74살까지, 평균연령 60대인 27명이 멤버다. 매주 목요일마다 이곳에 모여 연습을 하는데, 이날은 17명이 모였다. 서울, 이천, 용인, 남양주, 곤지암 등 곳곳에서 왔다.

지휘자인 김영중 연주나라 원장이 팔을 크게 휘젓기 시작했다. 알토 색소폰과 테너 색소폰 소리가 모여 ‘아리랑’ 가락이 됐다. 이어 ‘님과 함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구수하고 익숙한 멜로디가 흘렀다.

“치킨 왔습니다.” 한마디 외침이 휴식시간을 알렸다. 봉사활동에 열심이라고 경기도지사 표창을 받았다는 신복식(63)씨가 ‘한턱 쏜’ 치킨이다. 서울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신씨는 집수리, 도배 등 봉사활동을 한다. 색아들 멤버로 연주 봉사도 한다. 색아들은 노인정, 장애인단체, 지역축제, 지하철역사 등에서 연주 봉사를 자주 한다. “남한산성 입구에서 공연하면 사람들이 와서 물어봐요. ‘얼마나 배우면 이렇게 불 수 있나요?’ 하고요.” 색소폰 분 지 10년 됐다는 신씨가 말했다. “색소폰은 사람 목소리와 가장 비슷해서 더 매력적이죠.”

이곳 한국지역난방공사에서 근무하는 김순중(61)씨와 그의 아내 손경화(58)씨는 부부가 함께 색소폰을 분다. 남편이 먼저 알토 색소폰을 불다가 테너 색소폰으로 바꾸자 아내가 알토 색소폰을 이어받았다. “음악을 같이 하니 둘 다 젊어지는 것 같아요. 여기 오면 계속 웃게 돼, 엔도르핀이 솟고 세포가 살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거든요.” 손씨가 말했다. 이천에서 온 최덕희(63)씨도 여성 연주자다. 남편이 사놓고 내버려둔 색소폰을 5년 전 잡기 시작했다. “우리 또래 친구들 보면 다들 그냥 놀고 있는데, 저는 계속 새로운 곡에 도전하고 꿈을 가지잖아요. 보람차고 자부심이 생겨요.”

색소폰을 연주하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색소폰 대중화의 상징적 장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색소폰을 연주하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색소폰 대중화의 상징적 장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색소폰을 연주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색소폰 대중화의 상징적 장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색소폰을 연주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색소폰 대중화의 상징적 장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41~74살 평균연령 60대 연주단
매주 모여 가요·트로트 합주
젊은 시절 꿈 더 늦기 전에 이룬다
최근 여성 연주자도 크게 늘어
“기자 양반도 젊을 때 시작해”

최근 들어 여성 동호인들도 늘고 있다. 여영애 연주나라 실장은 “전에는 여성 회원이 거의 없었는데 요 몇년 새 급격히 늘었다. 아무래도 여성분이 더 시간 여유가 많아서인 것도 같다. 부부 연주자들도 많아졌다”고 귀띔했다. 색아들 멤버 27명 중 3분의 1에 가까운 8명이 여성이다. 경기도 이천에는 부부 5쌍이 속한 연주나라 색소폰 연주단도 있다고 한다.

남양주에서 온 이상묵(72)씨는 이날 참여자 중 최고령자다. “젊어서부터 하고 싶었지만 먹고살기 바빠 못했지. 개인사업을 하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해야겠다’ 싶어 2009년에 시작했어요.” 그는 “스트레스도 풀리고 복식호흡으로 폐활량이 좋아져 건강에도 좋다”고 색소폰 예찬론을 펼쳤다. 그는 남양주 색소폰 악단의 단장도 맡고 있다. 회비를 걷어 마련한 연습실에서 주기적으로 모여 연주한다.

색소폰은 2000년대 중후반부터 대중화됐는데, 특히 중장년층이 선호한다. 젊은 시절부터 악기 하나 다루는 게 꿈이었던 이들이 여유를 찾은 뒤 더 늦기 전에 시작하는 악기 1순위라는 것이다. 초보자들이 배우기에 크게 어렵지 않은데다, 독주와 합주 모두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다. 가격도 싸게는 30만~40만원대부터 있다. 가요, 가곡, 트로트, 팝 등 다양한 장르를 연주할 수 있다는 점도 대중화의 요인이다. 김영중 원장은 “색소폰은 사회성이 좋은 악기다. 다리 밑에서 색소폰을 불면서 모르는 사람끼리도 쉽게 교류한다”고 설명했다.

색소폰의 대중화에는 반주기의 보급도 크게 기여했다. 아마추어 연주자가 반주기를 틀고 연주하면 밴드와 합주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화면으로 연주법 동영상도 보여줘 혼자 연습하기에도 좋다. 27년 전통의 반주기 전문회사 엘프의 이기창 이사는 “반주기는 모든 악기 연주에 활용할 수 있는데, 고객의 60~70%가 색소폰 동호인들이다. 7~8년 전부터 색소폰 동호인들이 급격히 늘었다”고 전했다. 업계는 국내 색소폰 인구를 30만~50만명으로 추산한다. 학생과 전문 연주자도 있지만, 상당수가 아마추어 동호인들이다.

색소폰 동호인들이 특히 선호하는 연주자 워런 힐의 2014년 첫 내한공연 모습. (유앤아이커뮤니케이션즈 제공)
색소폰 동호인들이 특히 선호하는 연주자 워런 힐의 2014년 첫 내한공연 모습. (유앤아이커뮤니케이션즈 제공)
동호인들이 선호하는 전문 연주자도 따로 있다. 클래식이나 재즈 전문 연주자보다 팝 유명곡을 스무드 재즈로 편곡해 들려주는 워런 힐 같은 연주자를 동경한다. 워런 힐은 동호인들이 즐겨 연주하는 비틀스의 ‘헤이 주드’ 색소폰 버전 편곡자로도 유명하다. 워런 힐이 2014년 펼친 첫 내한공연은 색소폰 동호인들로 넘쳐났다. 앙코르 마지막 곡으로 ‘헤이 주드’를 연주할 때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두 손을 흔들었고,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오는 12일 대구 수성아트피아 용지홀, 13일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에서 할 예정인 두번째 내한공연도 색소폰 동호인들의 큰 관심사다. 지난 공연 때 뜨거운 반응에 감동한 워런 힐은 이번 공연에서 특별히 한국 가요를 색소폰으로 편곡해 들려줄 예정이라고 한다.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 사는 김석진(74)씨는 꼭 석달 전 색소폰을 처음 잡았다. 젊었을 때부터 관심을 가져왔지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불편한 왼손 탓에 선뜻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다 얼마 전 용기를 내어 동네 색소폰 학원을 찾았다. “재미는 있는데, 왼손이 뜻대로 잘 안 움직여 힘드네. 그래도 계속 해봐야지.” 그는 남들 1시간 연습할 때 3시간 연습한다. 언젠가 혼자서 멋지게 연주하는 게 꿈이다.

이번에 만난 장년층 색소폰 연주자들이 하나같이 한 말이 있다. “젊었을 때 시작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잘 불 텐데…. 기자 양반도 한살이라도 젊을 때 시작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무척 행복해 보였다. “색소폰은 나이와는 상관없는 것 같아요. 의욕만 있으면 돼요.” 색아들의 최덕희씨 말이다. 이날 연습에서 색아들이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 제목은 ‘내 나이가 어때서’였다.

성남/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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