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한식 셰프 4인방’. 사진 왼쪽에서부터 권우중·유현수·임정식·강민구 셰프. 사진 박미향 기자
국내 레스토랑 평가서 <블루리본서베이>가 마련한 ‘제1회 블루리본 어워드’가 지난달 19일 오후 6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사파이어볼룸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국내 내로라하는 셰프 100여명과 음식업계 관계자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여민종 <블루리본서베이> 발행인이자 대표는 “셰프가 장인정신으로 만든 음식을 여러 미식 전문가들과 일반 미식가들이 지속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자 셰프 시상식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은 바로 <블루리본서베이>의 독자들. 7~8월 두 달간 독자 1만1085명이 인터넷 투표에 참여했다. 모두 4개 부문에서 5명의 셰프가 수상했는데, 대상 격인 ‘올해의 셰프’에는 2015년 미슐랭 가이드 별점 두 개를 받은 미국 뉴욕의 레스토랑 ‘정식’과 국내 ‘정식당’을 운영하는 임정식 셰프와 프렌치 레스토랑 ‘레스쁘아 뒤 이부’를 운영하는 임기학 셰프가 선정됐다.
이날 행사에서 눈길을 끈 것은 4명의 셰프가 차린 한식 밥상이었다. 최근 ‘모던 한식 셰프 4인방’으로 꼽히는 이들은 강민구(31), 권우중(35), 유현수(37), 임정식(37) 셰프다. 이들은 협업을 통해 ‘모던 한식’의 진수를 보여줬다.
몇년 전부터 ‘한식의 세계화’ 이슈가 공론화되면서 한식의 정체성을 두고 음식업계와 전통음식 연구자,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어 왔다. 한국인이 먹는 음식이 한식일까? 그렇다면 국외 거주 한국인이 먹는 파스타도 한식일까? 지금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식일까? 그렇다면 서울의 서양식 레스토랑의 스테이크도 한식일까? 찌개나 냉면 같은 이 땅에서 역사가 오래된 음식만 한식일까? 그렇다면 치즈를 얹은 감자탕은 한식이 아닐까?
한국인이 한국서 먹으면 한식?
역사 오래된 음식만 한식?
젊은 셰프들, 틀 깨고 재해석
“전통도 시대 따라 새롭게 만들어야”
음식칼럼니스트 유지상씨는 “태고부터 한반도에서 한국인이 한국산 농산물로 전통적인 조리기법에 따라 만든 음식”이라고 정의하면서 “‘밥과 국’은 한식만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2012년 한국식생활문화학회 춘계학술대회 자료집에 따르면 한식은 ‘20세기 중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반도에서 생산된 식재료와 조리법으로 한국인이 만든 음식이 포함돼야 하며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다문화음식도 포용해야 한다’고 정의 내린다. 유씨도 “새롭게 창조되는 맛도 한식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은 같다.
이들 ‘모던 한식 셰프 4인방’이 만든 ‘모던 한식’ 또는 ‘뉴 코리안 퀴진’, ‘컨템퍼러리 한식’ 등은 ‘한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새로운 답을 하고 있다.
아뮈즈부슈(식전 주전부리)로 강민구 셰프가 낸 음식은 우리 사찰음식에도 자주 등장하는 김부각으로, 전복 내장이 들어간 아이올리소스(마늘과 마요네즈가 조화를 이룬 소스)와 망고소스가 올라간다. 김부각은 예사롭지 않다. 좀처럼 한식에서 사용하지 않는 재료인 타피오카(열대작물 카사바의 뿌리에서 채취한 식용녹말) 반죽이 섞였다. 또 프렌치 요리의 대표적인 고급 재료인 푸아그라(거위 간)를 된장과 황매실에 하루 동안 재운 뒤 백김치에 쌌다. 그는 “다시마로도 싸봤지만 백김치가 가장 잘 어울렸다”고 한다. 동서양 재료의 융합이다. 권우중 셰프는 가을 참게와 활대게로 뽑아낸 육수에 유정란과 참게 살, 내장 등을 섞고 쪄냈는데, 용기가 투박한 우리네 도자기가 아니라 아담한 디저트 용기다. 음식을 담아내는 방식이 서양식이다. 임정식 셰프의 ‘튀긴 김부각과 양념한 한우 우둔살’도 깔끔한 서양식 접시에 나온다. 우엉부각과 산나물밥을 낸 유현수 셰프도 넓고 오목한 우리네 전통그릇이 아니라 하얀 서양식 접시와 작은 수프 그릇을 활용했다.
‘들에서 채취한 가을 채소 과일 라비올리와 해산물’. 강민구 셰프의 솜씨. 사진 박미향 기자
메인 요리로 강민구 셰프는 라비올리(만두 형태의 파스타)를 만들었다. 하지만 평범한 이탈리아 라비올리와는 재료가 다르다. 메밀로 반죽하고 백김치 등이 소로 들어갔다. 우리네 약탕기에서 우린 채소육수와 토마토 콩소메를 라비올리 아래에 자작자작하게 깔았다. 콩소메는 대표적인 서양식 조리기술로 만든 맑은 수프다. 분자요리 등 서양식 조리기술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것도 ‘모던 한식’의 특징이다. 새로운 맛의 한식 개발도 이들의 목표다.
유현수 셰프가 만든 ‘멧돼지 된장쌈과 전치수’. 사진 박미향 기자
권우중 셰프의 숙성 도미회는 초장도 간장도 쌈장도 아닌 미더덕 젓갈에 찍어 먹는다. 식재료 발굴도 이들의 연구과제. 유현수 셰프가 만든 산채 잎에 싼 멧돼지고기는 동충하초 퓌레와 곁들여 먹는다. 그는 고기와 곁들이는 버섯요리에 산초기름을 뿌리고 꿩고기도 접시에 냈다. 유 세프는 “산초기름은 서양의 트러플(송로버섯)오일만큼이나 귀하고 꿩고기도 푸아그라처럼 고급 재료”라고 말한다. 1년간 사찰음식을 연구하면서 그가 재발견한 재료들이다.
‘돌하르방’. 임정식 셰프가 만든 요리. 사진 박미향 기자
임정식 셰프는 제주도를 상징하는 돌하르방무스를 만들었다. 숟가락으로 톡 깨니 안에서 달콤한 녹차무스가 줄줄 흘러나온다. 돌하르방은 초콜릿으로 코팅했는데, 우리네 식재료인 흑임자로 만든 초콜릿이다. 제주도산 우유로 만든 소르베가 곁들여졌다.
두달 반 전에 기획된 이 만찬이 나오기까지 어려움도 많았다. 권우중 셰프는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재료인 섬진강 참게 280마리 수급이 어렵다는 소식을 행사 닷새 전 듣고 기겁을 했다. “미리 얼려놔야 살을 다 짜서 재료로 쓸 수 있는데, 시간이 부족해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다행히 기온이 조금씩 올라가 간신히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셰프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상차림은 동료들의 밥상이다. 동종업계 ‘선수’들의 잣대는 까다롭다. 가뜩이나 섬세한 성격이 행사가 다가올수록 더 예민해졌다.
‘모던 한식’은 최근 몇 년 사이 세계적으로 뜨고 있는 한식 붐과도 연결되어 있다. 서양인들은 이런 방식을 통해 한식을 친근하게 받아들인다. 이미 뉴욕의 레스토랑 ‘정식’의 서양식 접시와 포크를 사용한 성게비빔밥은 서양인들의 혀를 사로잡았다.
임정식 셰프는 2000년대 말 ‘모던 한식’의 시작을 알리는 성게비빔밥 등을 서울에 있는 자신의 레스토랑 ‘정식당’에서 선보였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형태로 미식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임 셰프는 “프렌치도 ‘뉴 프렌치’, ‘모던 프렌치’ 등으로 진화하고 있고, 스페인의 레스토랑 ‘엘 불리’에서 스페인의 뿌리 깊은 전통과 현대적인 (조리)기술을 접목하는 것을 보고 ‘뉴 코리안 퀴진’을 하자고 결심했다”고 말한다. 권우중 셰프는 “‘모던 한식’은 과거 한식의 서비스 방식이나 틀을 깨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전통 한식을 제대로 알고 도전해야 하겠지만, 최근 일부 셰프들이 한식을 새롭게 해석한 ‘모던 한식’을 추구하는 흐름은 바람직하다고 본다”며 “전통도 시대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