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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접시에 설레다, ‘지글지글’ 불소리에 반하다

등록 2016-06-16 09:05수정 2016-06-23 14:14

서울 방배동의 프렌치 레스토랑 ‘라 싸브어’에서 막내 요리사 1일 체험을 한 박미향 기자. 조미진씨 제공.
서울 방배동의 프렌치 레스토랑 ‘라 싸브어’에서 막내 요리사 1일 체험을 한 박미향 기자. 조미진씨 제공.
맛 기자 박미향의 레스토랑 주방 ‘꼬미’ 체험기

의욕 넘치게 씻은 새싹잎 뭉개지고
암호 같은 주방 용어에 영혼 털리고
13시간 서서 접시 230장 닦아도
‘주방의 유혹’은 독하다, 그립다
10년 전, 미국의 저널리스트 빌 버포드가 출간한 <앗 뜨거워>를 읽고 조금 의아했다. 요리사 마리오 바탈리의 주방을 체험하고 쓴 그의 글은 빼어난 문체에 생동감이 넘쳤다. 하지만 ‘지엠오’(GMO·유전자변형작물)에 관한 르포도, 식품회사의 비리를 캔 특종도 아닌, ‘그냥’ 뉴욕 레스토랑의 주방 얘기였다. 지금은 그를 이해한다. 나처럼 그도 실제 주방이 얼마나 궁금했을까!

드디어 나에게도 주방을 경험할 기회가 왔다. 지난 4일, 국내 프랑스 유학파 1세대인 진경수 셰프의 ‘라 싸브어’에서 꼬미(견습생 또는 막내 요리사) 체험을 하기로 했다. 진 셰프가 15년 넘게 키워온 한국의 대표적인 프렌치 레스토랑의 주방은 어떨까? 춘추전국시대 결투장 같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도는 주방, 그곳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식빵에 올린 연어
식빵에 올린 연어
오전 9시30분, 주방에 들어섰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열 하면 주방이다. 성별, 나이, 학력 따위는 상관없다. 오로지 주방 칼을 누가 먼저 잡았냐부터 따진다. ‘라 싸브어’의 서열은 이랬다. 우선 진 셰프. 그는 오너 셰프로서 메뉴 개발, 경영 등 레스토랑 전반을 책임진다. 그다음은 주방의 2인자인 수셰프 차재환(35)씨. 동그란 안경을 걸친 얼굴에선 지적인 풍모가 느껴졌다. 스물여덟살의 이승일씨, 스물두살 동갑내기인 조미진씨와 김애진씨가 그의 뒤를 잇는 실력파 요리사다. 그리고 맨 밑바닥에 주방에서 천지분간 못 하는 내가 있었다.

주방 공간에도 서열이 있었다. 거대한 냉장고를 중심으로 앞쪽은 오픈 키친. 수셰프와 승일씨, 간혹 미진씨까지 조리에 나서는 곳이다. 내 사수인 애진씨와 내가 주로 머무는 설거지 공간은 뒤쪽이었다.

10시가 넘자 비좁은 주방에 솔솔 버터 향이 퍼졌다. 킁킁, ‘개코’가 발동했다. 주책맞게 식욕이 고개를 들었다. “자, 이 삶은 달걀을 숟가락으로 으깨세요.” 미진씨가 메마른 목소리로 지시했다. 서늘한 지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30분 전만 해도 “유명한 요리사가 될 거예요. 그때 꼭 저를 만나러 오셔요”라고 애교를 부렸던 미진씨였다. 껍질 벗긴 달걀을 스테인리스 망 위에 놓고 숟가락으로 눌렀다. ‘달걀노른자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으깼어야 했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눌렀나! 이런 젠장!’ 괜히 움츠러든다.

안경 너머 냉철한 눈매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셰프가 소리쳤다. “새싹잎 시켜라!” 척추가 곧추섰다. 순간 수셰프 뒤로 금빛의 후광이 보이는 듯했다. 셰프와 꼬미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파스타>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주방을 진두지휘하는 수셰프는, 묘하게도 성적 에너지가 충만한 카사노바처럼 보였다.

망고참치타르타르
망고참치타르타르
새싹잎을 씻는 일쯤은 문제없을 것 같았다. ‘빨리 씻고 수셰프 옆에서, 승일씨 옆에서 사바용 소스(달걀노른자 등으로 만드는 서양식 소스 중 하나)를 만들어야지!’ 꿈이 컸다. 새싹잎을 양손에 한 움큼씩 집어 씻기 시작했다. 선배들 눈치 보기는 나와 마찬가지인 애진씨가, 내가 씻은 새싹잎을 미진씨에게 보여줬다. “다 뭉치고 죽이 됐잖아요! 손님들은 돈을 내고 오는데 이런 걸 드릴 수 없어요, 언니!” 미진씨가 득달같이 달려와 말했다. “너무 많은 양을 물속에서 흔드신 거 아니에요? 살랑살랑 한 줌씩 하셔야죠!”

미진씨가 내가 씻은 새싹잎을 들고 오픈 키친으로 갔다. ‘수뇌부’들이 머리를 맞댔다. ‘잎을 살릴 수 있느냐’에 대한 논쟁 같은데, 어째 나한텐 ‘나를 어떻게 죽일 것이냐!’는 작당처럼 보였다. 잠시 후 내가 있던 설거지 공간 쪽으로 돌아온 미진씨가 준엄한 표정으로 잎 씻는 시범을 보였다. 나는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넋이 나갔다. 미국의 사진가 제임스 낙트웨이의 흑백사진을 보는 듯,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초고를 보는 듯, 설렜다. 다시 도전! 다시 검사! 미진씨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마침 주방 뒷문에서 구원자가 나타났다. 싱그러운 새 새싹잎을 가져온 배달원이었다. 배달원이 이렇게 미남으로 보인 적은 없었다! 애진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가 씻은 새싹잎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10인분이었다. 엉뚱한 열정이 빚은 참사였다. ‘그래! 난 막내야! 설거지 담당이라고!’ 애써 자기 위안에 매달렸다.

아스파라거스와 사바용 소스
아스파라거스와 사바용 소스
점심시간이 되자 설거지 공간으로 그릇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설거지를 하다 돌아서서, 짤주머니 속의 파프리카버터소스를 손바닥보다 작은 그릇에 짜 넣었다. 다시 그릇이 쌓이면 닦았다. 어느덧,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린 소스 포트(Sauce Pot)와 시트 팬(Sheet Pan. 재료를 다듬어 넣어두거나 오븐에 넣어 조리할 때 사용하는 팬)이 쌓여 있는 좁은 설거지 공간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게 느껴졌다. 처음 써본 커다란 ‘디시기’, 즉 업소용 식기세척기는 최고였다. 내가 주방용 세제를 푼 물을 접시에 칠해 디시기에 넣으면, 디시기는 ‘강호동 얼굴’ 2배만한 접시도 10초 만에 닦고 말렸다. 황새치 입처럼 긴 디저트 접시를 넣어도 몇 초 만에 뚝딱 끝났다. 문제는 접시를 꺼내 천으로 닦는 ‘핸들링’을 할 때였다. 디시기에서 꺼낸 접시에선 김이 모락모락, 그때서야 깨달았다. 빌 버포드의 책 제목이 왜 ‘앗 뜨거워’인지! 애진씨는 그 뜨거운 접시를 맨손으로 잡고 광목천으로 닦았다. ‘앗, 뜨거워’ 소리를 목구멍으로 삼켰다.

암호 같은 언어가 주방을 날아다녔다. ‘핸들링’, ‘토마토 2분 전’(토마토수프 서빙 2분 전), ‘알라 하나’(단품 한 개 주문), ‘안심 엠알’(안심스테이크 미디엄 레어로 굽기)…. 혼이 쏙 빠졌다. 시트 팬 안에, 녹인 버터와 마늘, 올리브오일 등에 재운 달팽이를 1인분인 5개씩 한 줄로 세웠다. 머리카락이 주뼛 섰다. 달팽이를 잘못 배치해 몇 번이나 줄을 바꿔 세웠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손님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퍼질수록 주방은 일에 몰두하느라 조용해졌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본주의는 ‘밥 먹는 이’와 ‘밥하는 이’를 진하고 굵은 선으로 확고하게 구분했다.

오후 4시. 드디어 우리들의 점심시간이다. 냉면이다. “곱빼기 없어요?” 옥류관의 냉면도 저리 가라, 천상의 맛이었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죽을 것 같았던 오전 일이 지나자 오후에는 꾀가 생겼다. 주방 시스템 전체가 파악됐고, 내가 뭘 해야 요리사들이 편한지 알게 됐다. 인정욕구인가, 동료애인가? 짬을 내 냉장고도 닦았다.

‘라 싸브어’의 주방 직원들. 왼쪽부터 차재환·조미진·이승일·김애진씨와 박미향 기자.
‘라 싸브어’의 주방 직원들. 왼쪽부터 차재환·조미진·이승일·김애진씨와 박미향 기자.
밤 9시50분. 손님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일은 아직 안 끝났다. 내일 장사를 위해 수셰프는 대게와 새우살로 크로켓을 빚었다. 승일씨는 화이트 아스파라거스의 질긴 겉을 벗기고, 미진씨는 초코 테린을 만들었다. 애진씨는 고구마를 으깼다.

이날 나는 접시 230장을 씻고, 파프리카소스를 40개의 그릇에 짜 넣고, 오렌지 20개의 껍질을 까고, 달팽이를 5개씩 44줄 세웠다. 방울토마토 30개를 가르다가 칼에 벴다. 이곳의 요리사들은 최소 3~4개월, 길게는 2년 넘게 이런 나날을 보냈다.

밤 11시, 주방을 나설 때는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점심을 먹을 때 말고는, 13시간 동안 한 번도 앉지 못했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부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는 고통스러운 하루였다. “주방 일, 특히 꼬미 일이 많이 고되다. 체력이 되는 남성들은 그나마 버텨내지만, 여성들은 그 단계를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더라”는 수셰프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다음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다시 주방에 가 설거지 파트에 서고 싶었다. 네 명의 요리사가 보고 싶고, 지글지글 스테이크 굽는 소리와 고소한 버터 향이 그리웠다. 오븐과 불판의 열대 지방, 오픈 키친 앞 온대 지방으로 이뤄진 신기한 나라 주방이 그리웠다. 주방은 ‘중독성’ 강한 유혹이었다. “힘들지만 요리가 좋아요. 이겨낼 거예요”라던 미진씨,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딨어요?”라던 애진씨를 이해할 것 같았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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