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의정부, 양주, 동두천 일대 주민들은 거주 지역의 앞 글자만 따서 스스로를 ‘의양동 주민’이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북한과 더 가깝고 이름난 유원지가 적어 여행지로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경기 분당이나 성남처럼 개발 붐이 일지도 않아 고즈넉한 분위기가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다. 하지만 최근 변화의 바람이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평남면옥’(동두천), ‘평양면옥’(의정부, 양주) 등의 냉면집과 ‘송추 가마골’ 같은 고깃집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의정부에 위치한 신한대학교 식품조리과학부 이은정 교수는 “양주 고읍동에 고급스러운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유입 인구가 늘어나자 이 일대가 신도시처럼 변하고 있다. 60년 넘는 냉면집 등 오래된 맛집에, 독특하고 매력적인 카페가 새로 생겨 이 지역이 전통과 현대가 함께 숨 쉬는 맛의 고장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의양동 맛 여행’의 안내자를 자처한 이 교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 맛집 평가서인 <블루리본 서베이>의 김은조 편집장도 동행했다.
여행지로 별 주목 못받던 동네에 아파트촌 들어서며 변화의 바람 오리집·냉면집 등 이름난 노포에 아름다운 카페들 생기며 ‘북적’
독특한 인테리어로 눈길 끄는 카페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
커피 스토리’(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423). 문을 열자 20대의 건강한 젊은이가 뛰어나왔다. 김다휘(22)씨였다. 요양원이나 들어설 법한 한적한 지역에서 진하고 단 베트남식 커피와 세련된 각종 생활소품을 파는 카페의 주인이 뜻밖에 20대였다. “취업보다 사업이 적성에 맞는다”는 김씨는 베트남 여행에서 반한 커피를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바꿔서 차림표에 올렸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카페 사업을 시작한 그는, 초기 자본은 부친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대신 등록금과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 해결했다. 그는 “초창기엔 손님이 하루에 한 명도 오지 않아 속상했지만 지금은 조금씩 달라져서 희망이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해 문을 연 ‘
카페 아를’(의정부시 장암동 99-4)은 최근 이 일대에서 가장 ‘핫(hot)한 카페‘로 문전성시인 곳이다. 구조가 독특했다. 문을 지나자 작은 정원이 나타났다. 정원 왼쪽에 있는 건물 1층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빵 냄새가 진동했다. 이곳은 베이커리이고, 2층은 브런치 메뉴와 음료 등을 판매하는 레스토랑이다. 1층 문 바로 맞은편엔 다시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이 문을 밀자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풍경이 펼쳐졌다. 화가 반 고흐를 좋아하는 주인장이, 고흐가 사랑한 도시 프랑스 아를의 느낌으로 꾸민 분수대와 커다란 정원이었는데, 언뜻 이탈리아 밀라노 거리의 몰을 축소시킨 듯한 느낌도 났다. 화려한 반바지와 헐렁한 티셔츠를 걸친 20대 여성들이 이곳에서 한동안 ‘셀카’를 찍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유리창 안으로는 커피, 빙수 등을 먹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
오크힐 커피’(의정부시 장암동 101-9)는 니콘카메라 국내 총판회사를 운영하는 남성규(52)씨가 지난해 초 연 카페로 직접 로스팅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2만3140㎡(7000평) 정도의 땅에 정원, 연못, 숲, 카페가 함께 들어서서 산책하기 좋다. 남씨가 울창한 숲의 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무슨 나무인지 아느냐?” 도토리나무였다. 가을이면 후드득 떨어지는 도토리를 줍겠다고 촐랑거리는 다람쥐들을 자주 본다고 했다. 카페 옥상에서는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자락이 보인다. 이 카페는 배우 이진욱이 출연했던 드라마 <미스터 블랙>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지역 토박이인 그는 “의정부가 예전에는 미군기지의 ‘기지촌 문화’가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서울에서 온 이들이 도시에서 경험한 문화 혜택을 추구하면서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차로 30여분 거리인 서울 노원구 주민들도 자주 찾는다고 한다.
맛으로 승부하는 전통의 식당들
‘
매초산성’(동두천시 탑동동 827-4)은 전라도 목포가 고향인 최성순(60)씨가 남편 김종현(60)씨와 22년 전 양주에 정착하면서 연 식당이다. 9만9173㎡(3만평)의 너른 땅에 식당과 카페 등을 운영한다. 곧 박물관도 세울 예정이라고 했다. 최씨는 일식, 한식 등을 두루 익힌 30년 경력의 요리사다. “아무리 손님이 몰려도 내가 직접 다 만든다. 다른 이에게 맡기면 안심이 안 된다”고 한다.
대표 메뉴인 ‘호박오리구이’는 양이 넉넉하고 반찬이 10가지도 넘게 나와 4~5명이 먹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 교수가 샐러드, 장아찌 등을 맛보고는 “단맛이 은은하다. 설탕 등을 일절 안 넣은 맛”이라고 평했다. 최씨는 “설탕 안 쓴다. 단맛은 북숭아, 매실 등 직접 재배하는 과일로 담근 효소를 사용해 낸다”고 말했다. 토마토김치는 별미였다. 잘 익은 물김치에 토마토를 하루 동안 담가둬서 만드는 김치다. 김 편집장은 “낙지젓갈 맛을 보라”고 권했다. 탱탱한 식감을 선물하는 낙지젓갈이었다. 훈제로 익혀 기름기가 거의 빠진 오리는 다디단 호박과 만나 색다른 맛을 냈다. 잘 익은 노란 호박에는 건포도, 버섯, 무화과 등과 각종 견과류가 박혀 있었다. 4인 기준 5만5000원인 호박오리구이 세트의 화룡점정은 들깨수제비였다. 이 교수는 “수제비 때문에 이곳을 찾는 이도 많다”고 했다. 이미 허기를 채운 맛 여행객들이지만 들깨수제비의 고소한 국물과 쫀득한 반죽에 반해 숟가락을 놓지 못했다. 그릇 바닥이 훤히 보일 때까지 마치 굴착기가 쉼 없이 땅을 파듯 숟가락질을 했다. 다시마, 마른 고추, 멸치 등으로 낸 육수에 부추, 호박 등으로 색을 낸 삼색 반죽과 들깻가루가 들어간다.
최씨가 22년 전 고생담을 풀어냈다. 남편과 시식용 도시락을 만들어 인근의 공장 등을 다니며 홍보를 했다고 한다. 그의 오리호박구이가 인기를 끌자 같은 음식을 파는 곳이 여러 곳 생겨나, 어느덧 오리호박구이는 이 지역 향토음식처럼 됐다.
14년 전 연 ‘
시실리’(양주시 유양동 301-5)에서도 오리호박구이를 판다. 삼치, 고등어 등의 생선구이 정식도 인기 메뉴다. 생선구이 정식을 시키니 잘 구워진 생선과 함께 묵은 김치, 돌솥밥이 나왔다. 맛과 식감이 각기 다른 여러 종류의 생선을 한꺼번에 맛보는 장점이 있는 식당이다. 10명 이상의 단체여행객이 가기에도 좋을 것 같다.
동두천·양주·의정부/글·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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