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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엔 불이 붙고 정신줄은 날아가고

등록 2017-01-11 19:37수정 2017-01-11 20:53

[ESC] 김민철의 가로늦게
낭만적인 포르투갈 휴양지에서 ’숙취’로 맞이한 새해 아침
알렉산드르가 술잔에 붙인 불. 김민철 제공
알렉산드르가 술잔에 붙인 불. 김민철 제공
눈 뜨자마자 직감했다. 직감이라는 건 언제나 믿을 만한 녀석이다. 그 녀석은 순식간에 내가 있는 곳, 있는 시간, 처한 상황, 전체적인 분위기까지 완벽하게 파악해버렸다. 그러고는 내게 말해주었다. ‘너, 올해는 망했어.’

그렇다. 하루를 망쳐버린 것이 아니라, 한 주 한 달을 망쳐버린 것이 아니라, 한 해를 망쳐버린 것이다. 내가. 아니, 정확히 말을 하자면 술이. 그 망할 놈의 술이. 한 해를 통째로 마셔버린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진심으로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술이.

직감은 옳았다. 다른 때도 아니고, 1월1일 아침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포르투갈이었다. 그러니까 1월1일 아침에 포르투갈의 남쪽 끝 휴양지 라구스에서 전날 너무 많이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입술이 바싹 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질 정도로 갈증을 느끼며. 도대체 내가 전날 얼마나 술을 마신 거지, 자책과 자학을 거듭하며 눈을 뜬 것이다. 떴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겨우겨우겨우, 정말 조금, 살포시. 겨우 눈을 뜨고 옆자리를 봤더니, 남편은 아직 눈을 1㎜도 못 뜬 상태였다. 아직도, 한참이나, 쿨쿨.

침대에 계속 누워 있었지만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잠과 두통과 숙취가 함께 몰려왔다. 끊임없이 승리를 거두는 건 숙취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숙취의 틈 사이로 지난밤의 기억들을 겨우겨우 건지기 시작했다.

우연히 간 술집에서 만난 술꾼들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고 보니
’술 쓰레기’로 깨어난 1월1일
한해를 망친 걸까, 정말 그런 걸까

분명 시작은 낭만적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려고 기어이 포르투갈의 휴양도시까지 갔으니, 낭만적이지 않을 턱이 없었다. 그 낯선 도시에서 하루를 보내다 낯선 술집에 들어갔다. 손님은 남편과 내가 유일했다. 가볍게 술 한 잔씩을 하고 일어서는데 젊은 바텐더가 우리를 붙잡았다.

“내일 뭐하세요?”

“내일이요? 12월31일?”

“네. 이 도시에 계속 머무르시면 여기에 오세요. 새해 파티가 열릴 거거든요.”

근사했다. 낭만적인 이 도시에 딱 어울리는 즉흥적인 초대였다.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였다. 그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것. 기꺼이 대답했다. “완전 좋아요! 내일 다시 올게요!”

여기까지가 12월30일의 기억이다. 지금 이 미칠 것 같은 숙취를 설명하려면 12월31일의 기억도 필요했다. 아니, 간절했다. 계속 침대에 누운 채 나는 지난밤의 기억도 하나둘씩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12월31일. 한 해의 마지막. 하지만 그런 감정에 휩싸여서 하루를 통째로 보낼 수는 없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평소처럼. 마치 12월의 아무 날처럼. 더 정확히는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그러다가 해가 지자 뭔가 근사한 곳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가장 신날 것 같은 술집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르. 술집 사장의 이름이 그랬다. 술집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혀를 완전하게 굴리며, 최대한 느끼하게, 알렉산드르. 딱딱한 독일을 못 견뎌 결국 도망쳐 나온 독일 청년이었다. 마치 잭 블랙 같은 외모로, 잭 블랙 같은 태도로, 독일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주인장이었다.

술꾼은 술꾼을 알아보는 법인가. 그게 동양인이건 서양인이건, 영국인이건 인도인이건, 인종 불문 국적 불문. 알렉산드르가 우리를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우리에게 물었다. “자(Jar. 병)?”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우리 앞에는 보통의 생맥주잔보다 훨씬 큰, 그러니까 잼을 담는 커다란 병 같은 술잔이 놓였다. 보는 손님들마다 우리를 향해, 동양에서 온 술꾼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줬다. 한 해의 마지막날이었고, 옆자리 할아버지와도, 앞자리 헤비메탈 마니아 남자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별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웃으며 모두 건배를 했다.

그때까지는 말짱했다. 12시가 되기 전에, 어제 우리를 초대한 그 술집에 가야 한다며 일어섰으니까. 천천히 언덕을 걸어올라가 어제 그 술집에 들어가 바텐더와 인사를 했다.

“진짜 오셨네요!”

“그럼요. 여기에서 새해를 맞으려고요.”

술을 또 한 잔씩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뭔가 이상했다. 오면 안 되는 곳에 온 것 같았다. 그 술집 안에 있는 사람들의 나이를 평균 내면 딱 스무살일 것 같았다. 하지만 30대 중반의 부부가 끼어서 갑자기 평균 나이가 치솟고 있었다. 분위기는 깨지고 있었고. 나이가 들면서 느는 건 눈치라더니, 정말로 눈치가 보였다.

술을 다 마시고 났더니 이제 새해가 되기 3분 전. 남편에게 말했다. 조용히.

“여기서 새해를 맞는 건 아닌 것 같지 않아?”

“응. 갈까?”

“아까 거기로?”

벌떡 일어났다. 얼른 술값을 계산했다. 딱 1분이 남아 있었다. 술집 문을 벌컥 열었다. 뛰기 시작했다. 언덕 아래로 다다다다다다다다. 왕년에 100미터 달리기 하던 기분으로. 아니 그거보다 더 열심히. 더 열정적으로. 이성의 끈을 이미 놓아버린 알렉산드르의 품으로! 우리를 보면서 계속 웃기만 했던 할아버지의 곁으로!

“10!” 그 순간 우리는 “9!” 알렉산드르의 술집 문을 “8!” 열었고, “7!” 사람들이 우릴 보고 “6!” 반가워했고 “5!” 알렉산드르는 얼른 “4!” 술을 두 잔 더 따랐고 “3!” 수염을 한 번 만졌고 “2!”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더니 “1!” 술잔들에 불을 붙였다.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

술집 안의 모두가 불붙은 술을 빨대로 쭉 들이켰고, 서로 새해를 축하하느라 술을 계속 더 시켰고, 신난 알렉산드르는 또 불을 붙였고, 그 사람들이 재미있어서 우리는 또 술을 시켰고, 또 시켰고, 그러니까 계속 시켰고, 마지막으로 한 잔만 더 시켰고… 그리하여 나는 1월1일, 포르투갈 라구스에서 술 쓰레기로 깨어난 것이었다. 아이고 머리야.

오후까지 내내 잤다. 자면서도 계속 괴로웠다. 숙취 때문에, 1월1일부터 숙취와 싸우고 있다는 한심함 때문에 괴로웠다. 새해를 통째로 망쳐버린 듯한 죄책감은 도무지 떨쳐내기 힘들었다. 그랬는데? 그해엔 별일이 없었다. 아니, 그해에도 좋은 일만 가득했다. 새해 첫날의 잘못 하나로 한 해 전체를 벌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새해 계획을 하나도 못 지켰다고? 올 한 해는 벌써 망한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그런 당신을 위해, 우리나라에는 ‘설날’이라는 새로운 1월1일이 존재한다. 설날부터 다시 시작해보려고 맘먹었는데, 또 실패한다면? 그런 분들을 위해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 알고 있겠지만 이 말은 몇 년 전부터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맘먹은 게 삼일밖에 안 간다’가 아니라 ‘삼일마다 새 마음 먹기’로. 모두 작심삼일하며 2017년 잘 보내시길.

김민철/카피라이터·<모든 요일의 여행>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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