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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서울…돌고 도는 2호선 ‘혼자 놀기’ 딱!

등록 2017-01-28 12:18수정 2017-01-28 16:16

박미향 기자의 ‘나홀로 지하철 여행’

만화책 읽다 내려 도시락 먹고
낮잠 한숨 잔 뒤 영화를 보다
창밖 눈쌓인 한강변에 설렌다
이 도시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지하철 2호선 여행은 한강 풍경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어 좋다.
지하철 2호선 여행은 한강 풍경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어 좋다.

명절 연휴 도시는 상대적으로 고요하다. ‘귀성’할 곳이 딱히 없거나, 꺼내지 않으면 더 좋을 취업·결혼·출산·육아 등의 질문을 쏟아내며 굳이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는 친척들을 피해 ‘혼자 놀 곳’이 필요하다면, 지하철은 더없이 맞춤한 곳이다. 출퇴근시간 붐비던 ‘지옥철’도 명절에는 한산하다. 도시의 고요를 즐기는 이색적인 공간이 된다. 교통비도 저렴하니 얇은 주머니 사정도 부담스럽지 않다. 취향에 따라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고, 볕이 잘 드는 역사 안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먹거리를 즐기면서 나만의 여행을 만끽할 수도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미리 ‘명절 혼자여행’을 해봤다. 서울시내를 빙글빙글 도는 순환선이니 갈아타거나 내릴 ‘걱정’이 없었다. ‘늦은 밤 한 애주가가 술에 취해 2호선을 타고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처음 탄 역이었다. 한 바퀴 돌았다 싶어 다시 잠이 들었는데, 눈떠보니 여전히 같은 역. 이게 뭔 일? 뒤늦게 정신이 든 그는 전철역 벤치에 앉아 잠든 자신을 발견했다.’ 전설 같은 우스갯소리가 전해오는 바로 그 노선, 맛 기자이자 애주가인 내겐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지난 20일 금요일. 아직 평일인 점을 고려해 비교적 호젓한 오전 11시에 2호선 교대역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신도림역 방향으로 도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가방에서 만화책 <절대미각 식탐정>을 꺼냈다. <미스터 초밥왕>의 지은이 데라사와 다이스케의 만화로, 흉악한 범인을 먹을거리로 잡는 식탐정 다카노 세이야의 얘기다. 지하철에서의 독서로 만화책만한 게 없다. 리코타 치즈를 넣은 티라미수가 사건의 열쇠가 되어 주인공이 범인을 잡는 장면을 넘기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확 몰려들었다. 환승역인 신도림역이었다. 지하철은 오묘한 곳이다. 겹겹이 사람들이 쌓여도 독서삼매경을 방해하지 않는다. 덜커덩덜커덩. 흔들거리는 지하철 속도에 맞춰 만화책이 술술 읽혔다. 만화에 지칠 때쯤 여행작가 노중훈의 <식당 골라주는 남자>를 펼쳤다. 작가가 고른 식당 중에 나는 몇 곳이나 갔는지 세는 재미가 컸다. 이제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만 읽으면 오늘 여행길에 준비한 책은 다 읽은 것이다.

전과 김밥으로 준비한 도시락.
전과 김밥으로 준비한 도시락.
오후 1시가 넘어가자 배가 고팠다. 전을 담은 도시락을 준비해 왔다. 한양대역에 내려 벤치에 앉았다. 창에서 쏟아지는 빛이 마음에 들었다. 이어폰에서는 이은미의 ‘녹턴’이 흘러나왔다. ‘꼭 다문 그대 입술이/ 왠지 오늘 더 슬퍼 보여/ 초조해 숨이 막혀요’. 전을 우걱우걱 씹어 먹다 내가 초조해 숨이 막힐 지경이 됐다. 청소하시는 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초리엔 ‘음식물쓰레기 네가 치울 거지?’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는 것 같았다.

2호선 인근에는 맛집 골목이 많다. 신당역에는 떡볶이골목이, 뚝섬역에는 뚝도시장이 있다. 1962년 연 뚝도시장(연면적 2861㎡)엔 132개 점포가 있다. 몇 년 전 활어시장이 조성됐고, 한 끼에 2천~3천원 하는 밥집도 많다. 바람도 쐴 겸 밖으로 나가 2호선 맛집을 다녀 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싣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온풍이 발바닥을 감쌌다. 자리는 따스하고 편안했다. 스르륵, 나도 모르게 고개를 다리까지 떨군 채 잠이 들었다. 마치 ‘2호선 애주가’처럼. 다른 승객들이 눈치 못 채게 침을 닦고 둘러보니 옆자리에 외국인들이 앉아 있었다. “웨어 아 유 프롬?”(어디서 오셨나요?) 왜 물었을까. 부끄러웠다. 돌아오는 답을 못 알아들으면 진짜 개망신이다. 그래도 설마, 나라 이름은 알아듣겠지. “이슬람에서 왔어요.” 이슬람? 이슬람은 나라 이름이 아닌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시 용기를 짜냈다. 어디로 가냐고. 그는 잠실역에 있는 백화점에 간다며 비싸냐고 물었다.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 모르지만) 비싸다고 말해줬다. 화장품을 살 건데 뭘 사면 좋으냐고 또 묻길래 국내 브랜드 두 개를 알려줬다. 에잇, 괜히 말을 텄다 싶었다. 기다리던 잠실역, 그들이 내리면서 감사 인사를 했다. 나도 “좋은 추억을 만들라”고 했다. 엄청나게 어색하게. 다음 역인 잠실새내역의 문이 열리자 번(부드러운 롤빵의 일종) 굽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마술피리 소리에 홀린 쥐처럼 내려 번 향기를 따라갔다. 어깨가 뻐근했다.

오후 3시. 번을 먹고 간단히 맨손체조를 했다. 든든한 배, 확 풀린 몸을 다시 지하철에 실었다. 갑자기, 어둠을 몰아낸 속살 같은 흰 빛이 달려들었다. 눈부셨다.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곧 합정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세상을 덮은 새하얀 눈이 보였다. 드라마 <도깨비>의 주인공 공유가 저 눈밭 어딘가에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도깨비가 있는 곳이 천국이다…. 행복한 망상이 이어졌다.

조용한 지하철은 책읽기에도 맞춤하다.
조용한 지하철은 책읽기에도 맞춤하다.

서울이 고향이지만 한 번도 이 도시의 매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런데 뫼비우스의 띠처럼 도는 2호선을 타고, 이어지는 빛과 어둠을 눈동자에 한가득 담아보니 도시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그동안 왜 한 번도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내가 자라 일하며 나이 들고 있는, 내 삶터를.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4천원을 주고 다운로드받은 영화 <줄리에타>.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이 영화는 강렬했다. 열차에서의 만남이 시작이다. (열차나 지하철이나) 20여분이 지나자 동공이 흔들리고 손에서 땀이 났다. 게임하기에 여념이 없는 옆자리 남학생 눈치도 보였다. 두 남녀의 뜨거운 ‘사랑’ 장면이 나와서였다. 단언컨대 이 영화는 인간의 다친 마음을 그린 예술영화다. 질투가 파괴를 부른다 해도 삶의 일부분이며, 삶은 원시적이지만 여전히 생동감 넘친다고 말한다. 미끌미끌거리는 날생선을 맨손으로 꽉 잡았을 때의 불쾌감과, 그 묵직한 덩어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기분을 동시에 들게 하는 영화다. 삶은 날생선이다.

그럼에도, 살빛이 또 나올까, 혹시라도 ‘변태’로 보일까 두려움에 영화를 덮었다. 그 대신 마마무의 노래 ‘1㎝의 자존심’을 골랐다. ‘너보다 내가 더 커/ 딱 1㎝ 차이’. 나보다 딱 1㎝ 큰 사람이 병풍처럼 내 앞에 서서 빛을 가렸다. 이어 고른 제아의 ‘유 어클록’이 위안이 됐다. ‘흔들려/ 바람이 불어 흔들려/ 흔들려’. 그렇다. 인생은 그렇게 ‘흔들거리는 것’이다.

2호선이 한 바퀴 도는 데 대략 1시간20분, 세 바퀴 반을 돌고 오후 4시반에 교대역을 빠져나왔다. 5시간 반의 짧고도 긴 여행이었다. 햇살이 좋아서, 바람이 좋지 않아서, 온도가 적당해서 모든 시간이 좋았다.

지하철 2호선 여행을 하려면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게 있다. 시간제한이다. 5시간을 넘기면 1구간 요금인 1250원을 더 내야 한다. 어느 대도시에서건 ‘꽂히는’ 지하철을 타면 지하철 여행은 할 수 있다. 굳이 지하철이 아니어도 된다. 햇살 비치는 자리에 앉아 만화책을 보면서 종점까지 여행하는 시내버스 종점여행도 해볼 만하다.


서울 익선동 풍경.
서울 익선동 풍경.

서울 지하철로 둘러볼 만한 곳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1908년 생긴 서대문형무소는 독립운동가와 민주투사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상징적인 장소다. 1998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3호선 독립문역.

성안마을 강풀만화거리 웹툰 작가 강풀의 <순정만화> 시리즈로 벽화를 꾸민 거리. 성안마을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안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붙은 이름이다. 5호선 강동역.

3D블랙아트 박물관 갖가지 기발한 빛의 마술을 체험하는 ‘아트미술’ 박물관. 4호선 명동역, 2호선 을지로입구역.

명동실탄사격장 14살부터 입장이 가능한 실탄 사격장. 코치가 일대일로 지도해 비교적 안전하다. 10발에 4만원이지만 내국인은 회원가입하면 첫회 3만원, 이후 2만원으로 이용할 수 있다. 신분증 지참 필수. 4호선 명동역.

익선동 한옥마을 최근 ‘핫 플레이스’로 뜬 한옥마을. 1930년대에 형성된 동네로, 좁고 운치 있는 골목에 세련된 카페, 액세서리 가게 등이 들어서 있다. 1·3·5호선 종로3가역.

석촌호수 송파구 잠실동과 신천동에 걸쳐 있는 인공호수. 울창한 숲과 도심의 야경이 매력적인 공원이다. 2호선 잠실역.

효창공원 김구 선생의 묘가 있는 효창공원은 소담한 숲과 오솔길 등이 있어 사랑받는 곳이다. 인근에 유명한 중국집 등 맛집도 많다. 6호선 효창공원역.

그밖에 서울역사박물관, 북촌 한옥마을, 전쟁기념관 등이 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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