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막연하게 모래바람이 부는 중동의 사막을 동경한 적이 있다. 순전히 동화 <아라비아나이트> 때문이었다. 지혜로운 여성 샤흐라자드가 잔인한 왕을 상대로 한 얘기는 5살 꼬마가 빨려들기에 충분했다. 산해진미가 넘치는 삽화도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닿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 나라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최근 할랄 푸드(무슬림에게 허락된 음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매년 방한하는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의 무슬림이 늘면서 전문식당들이 생겨나고 있다. 심지어 한식 할랄 식당도 있다. 지난해부터는 한국이슬람교중앙회(KMF)와 한국할랄인증원이 할랄 인증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장안의 내로라하는 할랄 음식 전문 식당을 다녀왔다.
“먹어본 적이 없는데, 매우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지난 20일 오후 2시, 할랄인증식당 ‘케르반 레스토랑’을 찾은 직장인 이정학(30)씨는 연신 “맛있다”고 평했다. 요구르트를 발라 구운 양고기에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최근 이씨와 같은 젊은 푸디(foodi. 새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다면 기꺼이 먼 곳까지 여행하는 이들)들에게 할랄 푸드는 새로운 체험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할랄 터키식의 중심 ‘케르반 레스토랑’
이정학씨가 반한 케르반 레스토랑은 5년 전에 문을 열었는데 직영점만 9개다. ‘미스터 케밥’, ‘술탄 케밥’, ‘케르반 베이커리’까지 합치면 식당은 총 14개다. 주인 시난 오즈투르크(44)의 고향인 터키의 할랄 음식을 파는 식당이다. 그는 1990년대 말 터키 정부의 장학금을 받고 유학 왔다가 한국이 좋아 눌러앉았다. 무역업체를 운영하면서 할랄 식당까지 열게 됐다. 이곳에는 닭고기 케밥 등 케밥만 6가지다. 요구르트를 발라 구운 양고기 등 고기 요리도 많다. 눈에 띄는 음식은 피데(Pide)다. 9가지가 넘는다. 밀가루 빵으로 소스에 찍어 먹기도 하고, 갖은 채소, 고기 등을 올려 굽기도 하는 터키 전통음식이다. ‘트윈 라흐마준’은 터키인이 가장 즐기는 피데다. 납작한 두 장의 빵 안에 별사탕 정도 크기의 작은 양고기 조각과 채소 등을 넣어 화덕에 구운 것이다. 피자처럼 보인다. 1호점 ‘케르반 이태원’의 김명석 부장은 “100만원이 넘는 할랄 인증 비용과 다소 긴 인증 기간은 문제”라고 말한다. 푸드플라이, 배달의민족 등을 이용하면 가정에서도 받아볼 수 있다. 곧 할랄 도시락도 출시한다.(용산구 이태원로 190/(02)792-4767/3500~3만1000원) 이밖에 ‘쌀람’ 등도 터키식 할랄 식당으로 유명하다.
마칸 치킨앤 누들의 ’볶음짜장’. 박미향 기자
한식도 할랄 음식이 있다 ‘마칸’
지난 18일 오전 10시30분. 이슬람사원의 기도 소리가 얇고 넓게 퍼지자 ‘마칸 레스토랑’의 주방은 분주해졌다. 예약한 무슬림 관광객이 곧 몰려올 시간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무슬림 페비엘 피다는 김소월 시에 반해 4년 전 유학 온 이다. 서울대에서 곧 현대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다. “한국 드라마 보면서 불고기, 닭강정, 프라이드치킨을 정말 먹어보고 싶었다”는 그는 “마칸이 생겨 정말 좋다”고 말한다. 주인은 한국 무슬림인 오승언(53)씨다. 최근 인근에 ‘마칸 치킨앤누들’도 열었다. 지난 20일 마칸 치킨앤누들에서는 무슬림의 탄성이 터졌다. “한국에 산 지 15년 만에 처음 짜장면을 맛본다”고 말하는 한 터키인 때문이었다. 이 식당에서는 돼지고기 대신 할랄 쇠고기를 넣은 짜장면을 판다. 할랄 닭강정, 할랄 볶음짜장도 있다. 마칸 레스토랑은 외국인의 입맛에 맞추느라 다소 달고 짜다. 한국이슬람교중앙회에서 할랄 인증을 받았다.(용산구 우사단로 10길 52/(02)6012-2231/8000~1만8000원) 이밖에 할랄 한식당으로 ‘이드’(우사단길), ‘니맛’(인천공항) 등이 있다.
인도식 할랄 푸드는 이곳, ‘봄베이 그릴’
“금요일마다 할랄 음식 뷔페 해요.” 2009년 한국에 온 인도인 카지자 베드(46)는 2014년에 인도식 할랄 음식 전문점 ‘봄베이 그릴’을 열었다. 인도 정통 소스인 라이타(raita), 봄베이샐러드, 사모사(인도식 튀김만두), 코르마(korma. 요구르트와 크림 등을 넣어 만든 순한 커리) 등 할랄 인증 인도음식이 60가지가 넘는다. 그는 “한국에서 할랄 도축장이 늘어나면 좀더 저렴하게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그러면 가격을 내릴 수 있는데”라고 아쉬움을 말했다. 한국이슬람교중앙회에서 할랄 인증을 받았다.(용산구 우사단로 10길 11/(02)792-7155/2500~6만원. 10000~18000원이 대부분)
‘꾸스꾸스’는 독특한 튀니지식 할랄 음식점
3년간 튀니지의 국립관광대학에서 한식을 가르쳤던 이지혜(49)씨가 연 튀니지 가정식 식당이다. 한국관광공사 할랄 음식점 분류에 따르면 이 식당은 할랄 음식 일부를 파는 ‘무슬림 프렌들리 식당’에 속한다. ‘옷자’(해물과 피망을 튀니지식 양념에 볶은 것), ‘쇼르바’(흰살 생선과 토마토, 매콤한 소스가 들어간 수프), ‘질바나’(닭가슴살, 완두콩을 같이 끓인 튀니지식 스튜), ‘생선 음바트나’(등 푸른 생선 안에 으깬 감자를 넣고 튀긴 음식) 등 생경한 음식이 가득하다. 가장 인기는 ‘브릭’(brick)이다. 듀럼밀을 반죽해 만든 얇은 피에 달걀, 으깬 감자, 양파, 파슬리 등을 넣고 싸 살짝 튀긴 음식이다. 신기한 건 피 안의 달걀이 반숙이란 점. 숟가락으로 건드리면 터지는데 흥건한 질감과 바삭한 피의 조화가 신기하다. 튀니지 무슬림들이 라마단(무슬림의 금식기간) 때 몸보신 차원에서 먹는 음식이다. 이씨는 “최근 살충제 달걀 파동 때문에 해당 농장이 아닌 곳의 달걀만 골라 쓰느라 고생”이라고 한다.(종로구 자하문로 5길 16-2/(02)6357-5762/8000~1만8000원)
달콤한 할랄 디저트의 세계 ‘이스탄불 딜라이트’
“정말 맛있어요.” 지난 20일, 아주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온 터키 무슬림 아느 아니사는 이태원의 할랄 인증 디저트 가게인 ‘이스탄불 딜라이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딸기쿠키나 오스만제국 시절부터 있었던 전통 터키 디저트 레바니(Revani) 등은 한국인의 입맛에는 지나치게 단 편인데 무슬림에게는 익숙한 맛이다. 이 가게에는 아이스크림을 포함해 10여가지 할랄 인증 디저트를 판다.(용산구 우사단로 10길 40/070-4209-3391/2000~5000원)
대표적인 이태원의 아랍 음식점 ‘두바이 레스토랑’
주한 아랍에미리트대사관 직원들이 자주 찾는 식당이다. 이미 유명해 ‘자가인증’을 인정받았다. 선반 등에 있는 시샤(물담배) 등은 이국적인 향취가 물씬 풍긴다. 샥슈카, 후무스, 파칼라 등 다채로운 중동 음식이 있다.(용산구 이태원로 192/(02)798-9277/6000~3만원대)
부산의 유일한 할랄 식당 ‘카파도키아’
2005년에 문 열어 부산에서는 가장 오래된 할랄 음식전문점이다. 부산외대 아랍어과를 졸업한 정경민(49) 사장이 할랄 음식 케이터링을 하면서 운영하는 식당이다. 울산 현대중공업 등 경상도 일대 대기업에 다니는 외국인 무슬림들이 자주 찾는다. 정씨는 “중국 무슬림 상대로 할랄 닭고기 삼계탕을 한 적도 있다. 동남아 무슬림은 우리와 입맛이 매우 비슷하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말했다. 그는 곧 할랄 밥차도 운영할 계획이다. 할랄 인증식당이다.(부산 금정구 금단로 123-9/(051)515-5981/3000~3만6000원)
팁)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인정하는 할랄 인증 국내기관은 한국이슬람교중앙회와 한국할랄인증원이다. 한국관광공사는 지난해부터 ‘무슬림 친화식당 분류제’를 도입했다. 할랄 인증을 받은 ‘할랄인증식당’(14곳), 조리사 등이 무슬림이고 이미 할랄 음식으로 유명한 ‘무슬림 자가인증 식당’(21곳), 할랄 음식 일부를 파는 ‘무슬림 프렌들리 식당’(171곳), 할랄 음식을 팔지는 않지만 무슬림의 금지 식품인 돼지고기 음식은 없는 ‘포크 프리 식당’(34곳) 등이다. 할랄 인증 식당은 가게 초입에 인증 동판이 걸려 있다.
할랄(Halal) 푸드
아랍어로 ‘허용된 것’이라는 뜻의 ‘할랄’과 음식을 뜻하는 ‘푸드’의 합성어. 이슬람 율법에 의해 허용된 식품과 음료, 식재료 등을 뜻함. 최근에는 대량 생산·유통되는 식품에 비해 신선하고 안전하다는 인식이 퍼져 웰빙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음.
마칸레스토랑 주인 오승언씨 인터뷰
[%%BLOCKQUOTE0%%] “순대, 선짓국은 우리 식당에 없어요.” 서울 이태원로에 있는 한식당 ‘마칸 레스토랑’의 주인 오승언(53)씨의 말이다. 이유는 마칸 레스토랑이 독특한 할랄 한식당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와 술, 죽은 동물의 피로 만든 음식은 금한다.
그는 무슬림이다. 두 딸과 아내도 무슬림이다. 평상시 가정에서 해 먹던 할랄 한식을 메뉴로 식당을 연 이유는 중동 쪽과 무역업을 하면서 만난 친구들의 요청이 많아서였다. “비즈니스로 한국을 방문한 친구들, 밥은 먹어야겠는데 이왕이면 한식을 하자”고 생각했다. “한국 무슬림으로서 의무”라고 말한다. 그가 이슬람교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전공인 아랍어에 매료되면서 이슬람교에도 빠져들었다.
그의 식당은 이미 유명세를 타 찾는 이가 많다. 주말에는 단체 예약손님 때문에 자리가 없다. 두번째 식당 ‘마칸 치킨앤누들’도 열었다. 할랄 짜장면, 할랄 닭강정 등을 파는 분식점이다. 하지만 한때 그도 어려움은 컸다. 젊은 날 무역업을 해 꽤 성공했던 그는 몇 년 전 아프리카 수단의 한 정비공장에 투자했다가 실패를 보았다. 아이엠에프(IMF) 때에도 회사를 번창시킨 그였는데도 말이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