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헐~
‘가능한 한 다 버리자.’ 이사를 앞두고 내린 결론이다. 비워야 찬다. 하지만 책을 확 줄이자는 아내의 제안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손때 묻은 책들, 꼭 읽고 싶어 남겨둔 책들을 처분하라니. “언제까지 지고 다닐 건데. 버리는 삶이 풍요롭다잖아.” 결국, 원칙을 정하고 책장을 비워나갔다. 아주 오래된 책들은 두고, 덜 오래된 것들은 다 버리고, 최근 것들은 1~2년 안에 꼭 읽을 것만 남기기로 했다. ‘헌책 삽니다’에 연락해, 책 사진을 찍어 보내자 가지러 오겠단다. 40여개 뭉치의 책들을 살펴보더니 딱 한마디 했다. “2만원!” 그가 책 뭉치를 트럭에 실으며 덧붙였다. “새 책이든 헌책이든 요즘 책 사 보는 사람 없어요.” 조금 시원하고 많이 섭섭했다.
책을 비우다 보니 뜻밖의 추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나가 잡다한 여행 책자와 자료 뭉치에 섞여 있던, 두툼하게 접힌 지도다. 한반도 지도. 그런데 제목이 ‘조선행정구역도’다. 조선동해·조선서해·조선해협 표기에, ‘혁명의 수도 평양 주요 혁명전적지’까지 표시돼 있다! 이 ‘불온해 보이는’ 지도가 왜? 펼쳐보고 나서 알았다. 남북 화해 시기, 2005년 북한 평양·묘향산 취재 때 북한 관광 안내 소책자들과 함께 가져온 거였다. 당시는 금강산에 이어 개성 관광의 문이 열리고 평양·묘향산 등으로 북한 관광지가 확대돼 가던 때다. 금강산도 개성도 마음먹으면 갈 수 있는 여행지였다. 불과 10여년 전인데 까마득한 옛일 같다. 지도와 평양·묘향산 관광 안내 자료를 보관해 둘까 생각하다, 버렸다. 비우면 차겠지. 대화가 확 풀려서 다시 언제든 갈 수 있는 여행지가 되길 기대하며.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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