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헐~
최근 개봉한 공포영화 <곤지암>이 인기라고 한다. 무섭다고 한다. 무서운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 안 봤지만 곤지암(곤지바위)엔 가봤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에 있는 2개의 바위다. 하나도 안 무서운 바위다. 무서운 건 곤지암천 가에 따로 있었다. 거기 ‘가지 마시라’고 하고 싶다. ‘가지 말라는 곳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
곤지바위를 구경하고 소머리국밥도 한 그릇 먹은 다음 차를 몰아 열미리 마을을 지날 때, 작은 갈색 표지판을 만났다. ‘백인대’라 쓰여 있다. 갈색 표지판은 문화재 표지다. 모르고 있던 문화재를 들여다보는 버릇은 여행기자를 하면서 생긴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조선 중기 유학자 송시열의 행적이 전해오는 절벽의 정자다.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2호다. 물길에 깊은 소가 많고 주변 경관도 좋아 옛날 주민들의 천렵 장소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를 몰고 들어가다 보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길이 아니라 ‘곤지암도축장 직영판매장’ 시설 안이다. 비닐 옷 입고 장화 신은 이에게 정자 있는 곳을 물었다. 곤지암천 쪽 길을 가리킨다. 건물을 끼고 돌자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핏빛 도로다. 길에 흥건하게 고인 시뻘건 핏물, 숨이 탁 막히는 지독한 피비린내…. 그리고 귀청을 찢을 듯이 강력한 동물의 괴성이 들려왔다. 말로만 듣던 도축장이었다. 소름 끼치는 비명은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됐다. 괴성을 들으며 어둡게 뚫린 도축장 문 앞을 지날 때, 낮에 먹은 소머리국밥과 며칠 전에 먹은 선지해장국·순댓국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것 같았다.
담 너머 구정물이 흐르는 하천 건너편 멀리 바위절벽 위로 정자가 보였다. 정자로 다가가는 길은 없었다. 비명과 피비린내 속에 멀리서 사진 몇 장 찍고 돌아 나왔다. 가볼 수도 없는 문화재를 방치해 놓고, 관광객을 왜 도살장으로 안내하나. 문화재 보려면 죽음의 냄새부터 맡으라는 건가. 차창을 활짝 열고 한참 달려도 피비린내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
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의 백인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